남한 땅 최북단의 또 다른 ‘땅끝마을’,
고성군 명파리

한승희

프리랜스 기자

남한 땅 최북단의 또 다른
‘땅끝마을’, 고성군 명파리

한승희

프리랜스 기자


‘땅끝마을’ 하면 대부분 한반도 남쪽 끝 해남을 떠올린다. 남한 영토의 가장 북쪽에 있는 또 다른 땅끝마을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 명파리는 가끔 북한 관련 뉴스에 등장하곤 한다. 특히 요즘처럼 남북한 사이에 긴장감이 돌 때, 몇몇 기자는 이곳을 방문해 동태를 살피고 “하루 빨리 남북 관계가 좋아져서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좋겠다”는 주민의 말을 받아 적는다. 


1998년 남북한 사이에 훈풍이 불어 금강산 육로 관광 사업이 시작되자,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명파리에도 훈훈한 기운이 맴돌았다. 마을을 관통하는 큰 길 ‘금강산로’를 따라 슈퍼와 식당, 민박집이 가지런히 늘어섰고, ‘평화마을 조성사업’이란 이름 아래 마을을 개발하는 여러 청사진이 그려졌다. 그러나 2008년 금강산 관광을 갔던 대한민국 국적 여성이 북한군에 피격된 사건을 계기로 들떠 있던 분위기는 차게 식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지만, 명파리의 시간은 2008년에 멈춰있다.

고성군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현내면에 명파리가 있다. 명파리 위쪽으로도 마을이 몇 곳 더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는 뉴스를 보고, 문득 명파리를 떠올렸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인근의 DMZ박물관과 통일전망대마저 4개월 째 문을 닫은 상황이라, 명파리는 찾는 사람은 더더욱 적을 터였다. 화창한 일요일 아침, 고성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북쪽의 땅끝마을 명파리의 안부가 궁금했다.


명파리와 가장 가까운 건 대진시외버스터미널이었지만 그곳까지 가는 차편이 없어서 다음으로 가까운 거진종합버스터미널에 내렸다. 터미널에서 거진읍 우체국 쪽으로 5분 정도 걸어 나와 ‘백작모텔’ 앞 군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친절한 듯 불친절한 버스 시간표와 노선도를 열심히 보며 명파리까지 가는 법을 연구했다. 우선 1-1번 농어촌버스를 타고 종점인 마차진리에서 내렸다. 마차진리 종점에서 출발해 명파리까지 가는 103번 마을버스를 타려면 정류장에서 1시간 20분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 마차진리 종점 정류장이 마차진해변 바로 앞이어서, 1시간 넘는 환승 대기 시간이 내심 반가웠다.

(위에서부터) ①마차진리 종점 버스 정류장. 이곳에서 하루 3회 명파리로 가는 103번 마을버스가 출발한다. ②마차진리 종점 버스 정류장 바로 맞은편이 마차진해변이다. ③④한적하고 평온했던 마차진해변.

일요일인데다 해수욕하기 알맞은 날씨였음에도 해변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예닐곱 살 된 두 아이에게 바다 수영을 가르치는 아버지와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연신 셀피를 찍는 자매, 바위가 많은 쪽에서 물갈퀴까지 신고 스노클링을 즐기는 할아버지가 드문드문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졌다. 한적하고 평안한 풍경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LED 전광판에 ‘101’자를 띄우고 정류장에 들어온 15인승 마을버스는 전광판 숫자를 ‘103’으로 바꾸고서 명파리를 향해 달렸다. 10분 정도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명파리에 도착했다. 나이 지긋한 버스 기사님께 “여기서 다시 마차진리로 가는 버스는 어디서 몇 시에 타느냐”고 여쭤보니 “앞으로 2시간 20분 후에 같은 장소에서 타면 된다”고 했다. 2시간 20분 안에 명파리의 안부를 확인해야 했다.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남한 영토의 최북단에 있는 명파리 초입. 마을을 관통하는 ‘금강산로’를 따라 식당, 슈퍼, 민박집이 늘어서 있다. 슈퍼 한 곳과 식당 한 곳을 빼고는 모두 오래 전 영업을 중단한 듯 보였다.

명파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풍경은 큰 길을 따라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간판 기둥이었다. 금강산 관광객을 맞이하며 한꺼번에 세운 모양이었다. 간판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가게들을 살폈지만, 문을 연 곳은 ‘금강산 슈퍼’와 ‘평양면옥’ 뿐이었다. 길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간판 기둥을 지나 좀 더 걸어가니 학교가 나왔다. 공식 명칭은 ‘대진초등학교 명파분교’이지만 으레 ‘명파초등학교’라 부르는 듯했다. 명파초등학교는 2014년 6월 인근 군부대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도주한 탈영병을 제압하려는 교전이 벌어지면서 뜻밖에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교문 앞에는 ‘최북단 명파 초등학교’라 쓰인 한반도 모양 간판이 서 있었고, 교정에는 ‘통일’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었다. 남한 최북단 초등학교 교정에서 ‘통일’이란 두 글자를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통일을 주제로 포스터를 그리고 글을 썼던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며 운동장을 천천히 돌았다. 전교생이 열 명 남짓이고, 전 학년을 통틀어 반이 6개인 작은 학교지만, 인적 드문 이 땅끝 마을에서 문 닫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게 느껴졌다.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초등학교인 ‘명파초등학교’.

명파초등학교를 나와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학교 담벼락이 끝나는 지점에서 ‘최북단 명파 해수욕장’이라 쓰인 빛바랜 표지판을 만났다. ‘동해의 맑은 물과 아름다운 백사장이 있는 곳’이란 의미를 담아 마을 이름이 ‘명파(明波)’가 되었다 하니, 가까이에 바다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두리번거렸으나, 바다가 나올 것 같은 풍경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켜고 도착지를 ‘명파해변’으로 설정하고서 액정을 수시로 확인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의심을 품고 10분 정도 걸어가니 갑자기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철조망 뒤편으로.

철조망에 가로막혀 있는 명파해변.

명파해변은 군부대에서 관리하는 곳으로 7월과 8월에만 잠깐 개방된다. 철조망 너머 해변에서는 포크레인 한 대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부지런히 모래를 퍼 나르고 있었다. 올 여름 해수욕장 개장을 앞두고 해변 정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철조망 앞쪽으로는 넓은 주차장과 오토 캠핑장이 조성돼 있었다. 샤워실과 화장실 모두 최근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캠핑을 하러 온 청년 한 무리가 캠핑장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샤워장을 이용하려는데 문은 잠겨있고 관리실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차 몇 대가 캠핑장에 들어와 잠시 둘러보고 금방 떠났다.

명파해변 바로 앞에는 ‘명파DMZ비치하우스’와 ‘명파해변비치하우스’가 있다. 두 건물 모두 숙박시설로 지어졌으나 현재 비어있다. 강원문화재단은 이 두 건물을 문화예술공간으로 재생할 예정이다.

해변 앞쪽엔 캠핑장 말고도 커다란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명파DMZ비치하우스’, 다른 하나는 ‘명파해변비치하우스’다. 두 건물 모두 숙박시설로 지어졌다가 수 년 전 문을 닫은 듯했다. 명파해변비치하우스는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 고성군이 주최한 ‘한반도 DMZ 평화 대행진 대한민국 최북단 고성 크리스마스 페스티벌’ 때 행사장으로 쓰였는데, 행사의 흔적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었다. 


노후 정도는 명파DMZ비치하우스가 더 심했다. 건물 입구 쪽으로 나 있는 계단 틈새로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었고, 여기저기 부서진 의자와 테이블이 널브러져 있었다. 1층 유리창에 붙어 있는 ‘편의점’, ‘커피숍’ 같은 스티커와 영업 중단을 알리는 공고문은 완전히 색이 바래있었다. 두 건물 모두 많은 사람의 기대 속에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지어졌을 것이다. 객실 테라스에서 명파해변이 한 눈에 들어오고, 걸어서 3분 거리에 ‘DMZ 천사의 길’이란 이름의 근사한 산책로도 있으니 사람이 많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쉬고 싶은 여행자에게는 적절한 휴식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찾아오는 손님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운영난이 심해졌고, 결국 문을 닫았을 것이다. 흔히 있는 일이다.


다행히 두 건물은 곧 새로운 쓸모를 찾게 될 예정이다. ‘DMZ 문화예술 삼매경’이란 이름 아래 이곳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생하는 프로젝트가 계획 중이라고 한다.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과 국내외 예술가들이 장기간 체류하며 창작활동을 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프로젝트의 주축이다. 어느 예술가가 이른 아침 테라스에서 일출을 감상한 후 아침을 먹고 DMZ 천사의 길을 산책하며 작업을 구상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명파DMZ비치하우스와 명파해변비치하우스 인근에는 ‘DMZ 천사의 길’이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다. 아래 사진은 DMZ 천사의 길에서 바라본 두 건물 모습.

해변에서 마을로 돌아와 버스 정류장에서 103번 버스를 기다렸다. 곱게 화장을 하고 화려한 꽃무늬 셔츠로 멋을 낸 할머니가 전동 체어를 타고 천천히 정류장을 지나갔다. 할머니는 공터에서 전동 체어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공들여 U턴을 한 후 다시 정류장을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공터로 향했다. 할머니는 몇 번이고 정류장과 공터를 오가며 운전 연습을 했다. 지친 기색도, 지겨운 기색도 없었다. 할머니의 운전 연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문득 ‘일상’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이제야 비로소 명파리의 일상을 한 조각 발견한 기분이었다.


예정된 시간에 맞춰 103번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중년의 여성이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스마트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버스는 5분 정도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다가 출발했다. 버스 문이 닫힐 때 ‘평양면옥’에서 사람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2020. 8.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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