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성 팀장
국립극단 홍보마케팅팀
정용성 팀장
국립극단 홍보마케팅팀
꽃처럼 아름다웠던 시간을 그리워하며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말을 좋아한다. ‘꽃처럼 아름다운 삶의 순간’이란 뜻이다. 과거의 특정한 순간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문득 돌이켜보면 아름다웠던 시간을 화양연화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전염병을 겪으면서, 마스크 없이 누군가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나누었던 이전의 모든 일상이 꽃처럼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땀을 흘리며 공연을 만들고, 배우들이 스스럼없이 객석의 관객에게 다가가 함께 호흡하던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립다.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 바야흐로 전환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문화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온라인으로 대표되는 비대면 접촉방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분야에 따라 온라인에 적응하는 모습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시각 분야는 온라인 콘텐츠로의 전환을 고민하기에 상대적으로 조금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시각적 자극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해야 하는 공연예술 분야의 경우 타 분야보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다. 대표적인 공연예술 분야인 연극을 제작하는 국립극단 역시 제대로 준비할 겨를도 없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마주했다.
2020년은 국립극단 7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해였기 때문에 사업 준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소처럼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작품을 기획한 것은 물론,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국립극단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작품을 준비했다. 하지만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러시아 박탄고프 극장의 황금마스크상 수상작 ‹바냐 삼촌› 등의 해외 초청 공연과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벨기에 리에주극장과의 협업으로 선보이고자 했던 많은 계획이 취소 또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70년이라는 시간 동안 동고동락했던 연극인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자리, 그리고 같은 시기에 70주년을 맞이하는 국립극장 창단 기념식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예정된 시기에 진행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올해 2월 첫 공연으로 선보일 예정이었던 배삼식 작·이성열 연출의 ‹화전가›의 개막이 채 1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잠정 중단하게 되었을 때만 해도, 공연을 취소하거나 중단하는 상황이 수개월 넘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진자는 계속 늘어났고,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지속해서 공연 중단·취소 협조 요청 공문이 전달되었다. 특히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한 이후로 예정된 해외 초청 공연이나 해외 예술단체와의 함께 작업하기로 한 공연들은 예외 없이 취소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우가 다쳐 취소되는 공연도 생기는 등 손쓸 틈도 없이 상황은 악화하였고, 매 공연 ‘이번에는 혹시 막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몇 달을 보냈다.
국립극단 직원뿐만 아니라 작품을 함께 만드는 이들의 고통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배우와 스태프를 비롯한 공연 팀 전체는 언제 막이 올라갈지 모르는 공연을 위해 공연 기간 내내 대기해야만 했다. 또 실시간 중계나 공연 녹화를 위해 빈 객석을 두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도 어색하고 어려웠을 것이다. 모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사태가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국립극단은 두 가지의 방향의 대안을 모색했다. 우선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과 연극인들을 위로하고 응원할 수 있는 사업의 추진함과 동시에, 코로나19 이전의 방식대로 공연을 제작하고,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해왔던 모든 것을 근본적인 지점부터 다시 생각하는 것이었다.
‘무대는 잠시 멈췄지만, 여기 연극이 있습니다’
많은 단체와 공연장이 각자의 특성을 살려 코로나19 관련 캠페인을 선보였다. 국립극단 또한 ‘연극’이라는 콘텐츠의 특성에 맞는 캠페인을 고민했고, 창단 70주년 표어로 발표했던 ‘여기 연극이 있습니다’에서 착안하여 ‘무대는 잠시 멈췄지만 여기 연극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온라인 상영회 캠페인을 시작했다.
국립극단의 온라인 상영회 ‘무대는 잠시 멈췄어도, 여기 연극이 있습니다’ 첫 상영작 ‹페스트›.
첫 번째 준비한 온라인 상영회에서는 국립극단의 선보였던 기존 작품의 영상 중에서 코로나19 시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작품인 알베르 카뮈 원작 ‹페스트(2017)›를 비롯해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2015)›, ‹1945(2017)›, ‹실수 연발(2016)› 등의 공연을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했다. 1차 상영회에 이어 2차 상영회에서는 총 4만여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한 ‹페스트(2017)›를 앙코르 상영하고, 그동안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던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2017)›와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에서 제작한 ‹비행소년 KW4839(2015)›를 연이어 선보였다. 이후 매일 아침 한 줄의 연극 대사를 한 장씩 넘기는 달력 형태의 ‘연극 속 대사 한 줄’ 캠페인을 진행해 코로나19로 지쳐 있는 사람들의 일상에 힘을 불어넣고 위로를 전했다. ‘연극 속 대사 한 줄’ 캠페인은 단지 일회성 콘텐츠가 아니라 여러 가지 주제를 추가해 지속해서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도록 인스타그램 프로필 하이라이트에 시리즈로 고정해두었다. 이밖에 국립극단 단원이 대본 속 한 장면의 대사와 지문을 낭독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은 ‘짧은 연극 낭독회’를 통해 무대에서 관객과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랬다. ‘짧은 연극 낭독회’는 2020년 예정된 공연 중 6개 작품으로 구성해 공연을 미리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다시 연극이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연극계의 활동 위축과 침체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국립극단은 민간 연극 단체와 연극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공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극복할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취소된 공연을 다시 상연하고자 하는 단체·개인에게 국립극단의 소극장 ‘판’을 공연 장소로 제공하고 공연 제작비 일부를 지원하는 공모 사업 ‘다시 연극이 있습니다’가 그 예다. 연극인에게는 공연을 다시 무대에 올릴 기회를, 관객에게는 다시 공연을 만날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올해 11월과 12월에는 공모에 선정된 단체·개인의 공연을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만날 수 있다.
전환의 시대를 준비하다
예전처럼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기 어렵고, 공연을 만드는 이들의 안전 또한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간단하게 답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공연 공급자가 제공하는 작품을 관객이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기존의 구조를 넘어, 온라인 동영상 상영과 같은 비대면 접촉방식이 활용되면서 관객 스스로 콘텐츠를 향유하는 방식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나 표현 방식을 더욱 고도화해야 한다. 예전에는 컴컴한 극장의 좌석에 앉은 관객은 작품이 재미가 없더라도 막이 내릴 때까지 중간에 자리를 뜨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일시 정지 버튼 하나로 공연관람을 스스로 중단할 수 있다. 관객이 집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 개발과 공급체계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것이다.
온라인에서 관객 2만 명과 만난 청소년극 ‹영지›.
이와 더불어 공연 제작 과정, 예술가와의 만남, 체험·교육 프로그램 등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필요성 또한 커졌다. 이를 위해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에서는 청소년극 ‹영지›를 여러 차례 생중계해 전국의 약 2만 명이 넘는 청소년 관객을 만났다. 예술가와의 대화 프로그램 또한 실시간 생중계하면서 관객에게 공연 관련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온라인 프로그램 북과 공연 전후에 활용할 수 있는 워크북을 제작했다. 아울러 공연과 연계해서 6차시 분량으로 기획했던 대면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유튜브를 활용해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이때 영상 콘텐츠와 플랫폼을 연극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용도로만 한정해 활용함으로써 프로그램 참여자가 독립적으로 학습에 참여하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식 전달 중심 학습 방식이 아니라 인지적 상호작용과 더불어 사회적·정서적 상호작용을 자극하는 새로운 예술교육 모델이 개발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뿐만 아니라 성인보다 자기주도력과 자율성이 낮은 어린이와 청소년에 적합한 비대면 예술교육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온라인에서 영상으로 공연을 만날 기회가 늘어나면서 관객이 상연 시간 동안 온전히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작업 또한 중요해졌다. 관객이 공연을 보는 집이라는 공간을 일시적으로 극장과 객석처럼 꾸미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공연에 참여한 예술가들에게 사례비를 지급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상연 기간을 기준으로 사례비를 지급했지만, 공연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나게 되면 이러한 방식은 더는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은 코로나19로 인한 변화들을 새로운 기회로 삼고자 한다. 특히 명동예술극장, 백성희장민호극장, 소극장 판 등 서울에 있는 국립극단 공연장 외에 다양한 지역에서도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관객 대부분이 서울, 수도권에 거주하는 점이 늘 아쉬웠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인 온라인에서는 국립극단의 공연을 국내의 다양한 지역에 사는 관객, 나아가 해외 관객을 대상으로 선보일 수 있다. 변화의 한 복판에 서서 다시 한 번 ‘화양연화(花樣年華)’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