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카데미!” 부디 우리 오래 만나요

— 14년 만에 문 연 원주 유일 단관극장 ‘아카데미 극장’ 탐방

한승희

프리랜스 기자

“안녕, 아카데미!” 
부디 우리 오래 만나요 


14년 만에 문 연 원주 유일 단관극장
‘아카데미 극장’ 탐방

한승희

프리랜스 기자


자라면서 ‘다행히’ 단관극장 역사의 끄트머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쓴 이유는 단관(單館)극장, 즉 상영관이 단 하나뿐인 형태의 영화관이 한국 대중문화사(史)와 영화산업사(史)에서 중요한 한 단락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1907년 서울 종로에 상설 영화관 ‘단성사’가 개관한 이래, 전국 곳곳 번화가에 하나둘 영화관이 들어섰다. 주로 ‘OO극장’이란 간판을 얹은, 접혔다 펴질 때면 삐그덕 소리를 내는 나무 의자 수백 개와 큼직한 스크린이 벽에 걸린 방 한 칸을 품은 형태였다. 상영관이 하나뿐이니 그날 볼 수 있는 영화도 한 편뿐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푯값을 치를 금전적 여유와 어두컴컴한 상영관에서 두 시간 남짓을 보낼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됐다. 당시에는 영화관에 가는 걸 ‘극장 구경 간다’고도 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은 영화를 떠나 그냥 ‘극장’에 가는 것 자체를 즐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강원도에 첫 상설 영화관이 들어선 건 1930년대1)이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1950년대 중반부터 단관극장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원주 시내엔 1956년부터 불과 10년 사이에 단관극장이 5곳이나 문을 열었다. 원주에 밀집해 있는 군부대에서 훈련받는 군인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았던 ‘군인극장(1956)’에 이어 ‘원주극장(1956)’, ‘시공관(1962)’, ‘아카데미극장(1963)’, ‘문화극장(1967)’이 개관했다. 군인극장을 제외한 나머지 네 극장은 서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이웃이었다.2)


원주 단관극장들의 생애도 다른 도시의 단관극장들과 비슷한 굴곡을 그리며 사그라들었다. 1990년대 상영관 여러 개를 갖춘 ‘복합상영관(흔히 멀티플렉스라 한다)’이 부상했고, 1998년  ‘CGV강변’3)을 시작으로 대기업이 만든 체인형 복합상영관이 줄줄이 개업하며 단관극장의 쇠퇴를 가속했다. 2000년대는 단관극장 폐관의 역사였다. 광주 ‘현대극장(2003)’, 대구 ‘아세아극장(2004)’, 대전 ‘신도극장’·‘대전극장(2004)’, 부산 ‘삼일극장(2006)’·‘국도극장(2008)’4)… 원주의 단관극장들도 예외일 순 없었다. 2005년 원주 시내에 ‘롯데시네마’가 들어섰고, 사람들은 상영관이 하나뿐인 낡은 극장들을 외면했다. 롯데시네마가 개관한 지 1년 만인 2006년, 원주극장, 시공관, 아카데미극장, 문화극장은 결국 모조리 문을 닫았다. 경영난을 이겨낼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5)

단관극장 시절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원주 ‘아카데미극장’ 매표소.

문 닫은 극장 건물들은 덩치 큰 골칫덩이였다. 부수고 빌딩을 올리자는 의견과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 충돌했다. 그사이 헐려버린 극장도 있고, 위태롭게 살아남은 극장도 있다. 아카데미 극장은 후자다. 2015년 마지막 남았던 이웃 문화극장까지 철거되면서 아카데미극장은 원주 유일 단관극장 건물이 됐다. 아카데미극장을 지키기 위해 나선 건 이곳에서 각자의 ‘시네마천국’을 그렸던 추억을 간직한 원주 시민들이었다. 2016년 원주 시민들은 아카데미극장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설문조사와 포럼, 토론회를 열었다. 원주 단관극장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씨도로 : 씨네마로드(이민엽 감독)〉도 제작됐다. 2017년엔 책 『원주 단관극장 이야기 : 먼지 쌓은 극장에 불을 켜다』 가 출간됐고, 원주시역사박물관에선 원주 단관극장의 역사를 보듬는 전시회가 열렸다.


아카데미극장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노력도 자본력 앞에서는 위기를 맞았다. 2017년 말 아카데미극장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극장의 운명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그 동안 아카데미극장은 1963년 개관 이래 줄곧 영사기사였던 정운학 대표가 운영해왔으나, 100세를 넘긴 노인에게 문 닫은 극장을 지켜내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시민들은 임팩트 투자자를 만나기도 하고, 시민 자산화 모델을 공부하면서 어떻게든 원주 유일 단관극장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번번이 쓴맛을 봤다. 2019년엔 문화재청의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사업’에 공모했으나 떨어졌고, 같은 해 8월 결국 철거 통보를 받았다. 다행히 원주시가 나서 철거 시점은 2020년으로 유예됐다. 남은 시간 1년. 시민들은 아카데미극장 심폐소생을 위한 ‘막판 뒤집기’에 나섰고, 다행히 판은 조금씩 뒤집히고 있다. 시민들은 원주시로부터 아카데미극장 건물과 주변 부지가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에 선정될 경우 시에서 토지를 매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제가 붙은 약속이지만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엔 충분한 에너지가 됐다.

길 건너에서 바라본 아카데미극장 전경. 극장 건물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 늘 사람들이 극장 앞을 지나다닌다.

올 8월 12~14일, 11월 4~7일 두 차례에 걸쳐 아카데미극장에서 열린 프로그램 ‘안녕 아카데미’는 어렵게 지켜낸 이 희망의 불씨를 키워보려는 노력이다. 원주영상미디어센터와 원주시역사박물관이 나서서 한시적으로나마 시민들을 극장으로 초대하고자 기획한 게 ‘안녕 아카데미’다. 14년 만의 개방을 앞두고 모처럼 아카데미극장은 목욕재계를 했다. 변색된 옛 영화 포스터와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영사기들이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손님을 맞이했다. 넓은 스크린을 좌지우지하는 상영관 뒤쪽 작은 공간 영사실도 14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늘 닫혀만 있던 문을 열어두었고, 아카데미극장의 43년 역사 동안 외부인에게 개방된 적 없던, 극장 뒤편에 있는 정운학 대표의 집도 조심스레 공개됐다.

14년 전 어딘가에서 정지된 듯한, 낡고 조금은 지친 기색이 느껴지는 아카데미극장 영사실.

영화 간판 그리기, 건축가와 함께하는 아카데미극장 투어, ‘인생극장 무대’를 주제로 한 팝업 그림책 만들기 워크숍 등 참여형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이 밖에 원주독립출판교류회 ‘원주율’, 서울 대학로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과 협업해 극장 통로를 큐레이션 서가로 꾸미고, 상영관 무대엔 원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연극과 음악 공연을 올렸다. 〈빽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1985)〉 같은 추억의 영화도 상영됐다. 아카데미극장의 스크린 위로 영화가 상영된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폐점 위기에 놓였다가 새 주인을 만나 35년 역사를 이어가는 서울 대학로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은 ‘아카데미책방’이란 기획으로 상영관에서 화장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큐레이션 서가로 꾸몄다.

코로나19바이러스 확산 우려만 없었더라면 ‘안녕 아카데미’는 더 오랫동안 더 많은 사람을 초대했을 것이나, 사회적 거리두기 수칙에 따라 체험 프로그램 참여 인원을 10명 이하로 축소하고, 200여 석 규모 상영관 무대에서 진행된 공연도 객석의 70% 이상을 비워둔 채 진행해야 했다. 사람들이 편하게 극장 공간을 둘러볼 수 있도록 마련한 ‘자유 관람’ 시간도 그다지 자유롭진 못했다. 8월에는 오전 10시부터 늦게는 밤 8시까지 자유 관람이 가능했으나, 11월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로 확 줄었다.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옛 단관극장의 맨얼굴을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인지라, 아카데미극장과 크게 연이 없는 원주 밖 사람들도 더 많이 찾아올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반 백 년 전 사람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극장 구경’을 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극장 내부 곳곳을 둘러볼 수 있도록 15곳에 배치해둔 스탬프와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아카데미 여권’. 자유 관람객을 위한 아이디어다.

아카데미극장의 미래는 아직 알 수 없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아카데미극장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곳이 원주 단관극장의 역사, 원주 시민들의 문화생활사의 증인으로 계속 자리를 지켜줄 것이라 기대해본다. 현재 전국에서 단관극장, 즉 상영관이 하나뿐인 ‘영화관’으로 여전히 기능하는 곳은 광주의 ‘광주극장’ 뿐이다. 아카데미극장이 맥을 잇게 되더라도, ‘영화관’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아카데미극장의 상영관에서 영화가 재생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그 자리에서 43년 역사를 증명하고, 기억을 보존해주었으면 한다. 어떤 것들은 거기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부디 아카데미극장과 오래오래 만날 수 있길. 아카데미극장의 안녕(安寧)을 빈다. 안녕, 아카데미!


1) 변해원, 「사라졌지만, 살아있는」, 미디어문화매거진 <모두>, 원주영상미디어센터, vol.3, 2015. 

2) 위의 글. 

3) ‘한국인의 여가를 바꾼 멀티플렉스 20년 ’빛과 그늘‘’, 국민일보, 2018년 4월 23일 자. 

4) ‘추억의 끝에 선 단관영화관’, 한겨레, 2009년 8월 31일 자. 

5) ‘극장의 추억, 철거 대신 ’보존‘ 길 열었다’, 강원도민일보, 2020년 5월 11일 자.

2020. 12.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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