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해하시길, 그리고 아파하시길 
— 동물권 주제 단편소설집 『무민은 채식주의자』 리뷰

이야호

독립문예지 ‹토이박스› 편집장

애틋해하시길, 
그리고 아파하시길 


동물권 주제 단편소설집
『무민은 채식주의자』 리뷰

이야호

독립문예지 ‹토이박스› 편집장


개에 대한 찬사가 아무리 넘쳐나도 내 개에 대한 찬사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변주곡. 개는 아침에 깨자마자 내 입가를 빠르게 핥으며 간밤의 안부를 전한다. 개는 오전 일정으로 공놀이 한판과 간식 찾기 놀이를 예정하고 있으므로 ‘으르릉’, ‘낑낑’ 보채기 노랫가락을 부르며 자꾸만 나를 일으킨다. ‘나랑 놀면 재미없어? 왜 자꾸 책상으로 가서 재미없게 미동 자세로 앉아 있느냐’고. 내 개는 말하는 것이다. 이 한 단락은 평범한 어느 하루 오전에 작성되었고, 나는 고작 몇 문장을 쓰는 동안에도 여러 번 자리를 뜨며 개의 요구사항을 경청해 주어야 했다. 보리야, 안 돼. 이제는 정말 써야 돼... 

개와 산 지 일 년 반. 온 식구의 삶이 하나, 둘, 아니 송두리째 개가 있는 삶으로 변했다. 개는 집 안을 이리저리 다니며 시선과 관심의 중력장을 단숨에 흔들어 놓는다. ‘우리가 나중에 죽으면 하늘나라에 먼저 가 있던 개가 마중 나와 반겨준대-’라는 오래된 위로의 이야기는 눈물샘을 한 방에 열 수 있는 방류 장치가 되었다. 개와 사는 삶은, 아니 이 개와 사는 삶은 처음이라.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준비할 것도 노력할 것도 많다. 새롭게 알아가는 세계가 넓다. 개와 함께하며 인간과 개에게, 아니 나와 보리에게 더 충실한 삶을 구상하게 되는데 이 책을 읽고 동물과 함께 사는 삶을 가늠해 보는 일도 그중 하나다.


아파하시기를 바랍니다 

『무민은 채식주의자』 (구병모 외, 2018)는 출판사 걷는사람의 ‘짧아도 괜찮아’ 네 번째 시리즈이다. 동물권(Animal Rights)을 생각하고 존중하자는 기획 의도를 내세우고 있는 드문 책이기도 하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판형에 편당 5~6장 분량의 초단편 소설 16편이 들어있다. ‘짧아도 괜찮’다지만, 몇몇 소설은 짧은 분량이 못내 아쉽다. 


책 맨 앞에는 동물권이라는 희소한 주제로 소설집을 기획하게 된 경위가 담긴 기획의 말이 실려 있다. 걷는사람 편집부는 평소 동물에 깊은 애정을 가진 16명 작가에게 작품을 부탁했다고 한다. 


“6개월쯤 지나 편집부로 모인 작품들은 하나같이 애틋했습니다. 그리고 가슴 가운데를 꿰찌르는 알 수 없는 통증을 안겼습니다. 앞으로 이 책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실 독자분들도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시리라 예감합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있는 힘껏 애틋해 하시길, 또 아파하시길 바랍니다.” (『무민은 채식주의자』 기획의 말 중)


편집부는 독자를 아프게 하는 책을 내고, 아프라고 권하는 글은 쓴 셈이다. 위안을 얻거나 위로가 되라는 말, 치유가 되거나 새로운 세계를 상상해 보라는 권유는 많아도 이런 말은 낯설다. 나는 아팠다는 말, 당신도 아프라는 말. 그러니까 같이 아프자는 말은 동물권을 대하는 우리의 가장 공통적인 각오이자 물러설 수 없는 입장 같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아픔을 겪어야 하며, 또 어떻게 함께 아플 수 있을까?

단편집 『무민은 채식주의자』. ⓒ 걷는사람

『무민은 채식주의자』에 실린 16편 작품에는 다양한 동물들의 이야기, 동물들과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강아지, 고양이, 햄스터, 토끼, 닭, 소, 고릴라 등 여러 동물이 출현하고, 공간도 시점도 다양하다. 집에서 같이 사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있는 한편, 동물원, 사육장, 도축장이 배경이 되거나 육식이 과거의 문화가 되어 버린 미래로 벌써 떠나 있는 작품도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 애착 관계를 다루는 작품도 있고, 처음 만난 동물과의 낯선 관계를 그리는 작품과 동물의 시점에서 그들의 생각과 입장을 말하는 작품, 여전히 이야기를 위해 동물이 동원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작품도 있었다. 

기획이 돋보이는 소설집이다 보니,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무민은 채식주의자』를 찾아보았다. 어떤 이는 몇몇 소설에 상당히 공감이 갔지만, 어떤 소설은 ‘너무 (앞서) 나가 있다’고 느꼈다. 또 어떤 이는 어린 시절 개에게 물린 이후 확실한 거리감이 있을 때만(예컨대 화면을 통할 때만) 동물을 보는 눈빛에 애정을 담을 수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 거리감을 좁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책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이는 소설 분량에 대한 불만을 남기기도 했다. 초단편 소설집인 이 책의 호흡은 장편이나 단편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어색할 수 있다. 이야기가 막 시작될 것 같을 때 끝나기 때문이다. 이 리뷰로 인해서 나는 초단편이라는 길이와 동물권이라는 주제를 연관 지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과연 리뷰어 말대로 많은 수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인 만큼 소설마다 품이 들쑥날쑥하다고 느낄 여지가 충분해 보였다. 더군다나 편집부는 16편의 소설을 작가 이름 가나다순으로 배치했으니, 이야기의 굴곡을 넘으며 호흡을 조절하는 건 독자의 몫이었다. 다만, 이 책은 다름 아닌 동물권을 주제로 하기에 많은 이의 여러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이 적절했다고 선해할 여지가 있다.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동물의 종 수는 수백만 종이 넘기로 알려져 있다. 그중 곤충의 종수만 3천만 종 이상을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숫자만 헤아려도 감이 오지만, 개별 인간과 개별 동물들과의 다양하고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관계들을 떠올리면, 초단편일지라도 하나라도 더 많은 시선과 상상력의 사례를 담는다는 구상이 썩 알맞게 느껴진다.


더불어 살기, 더불어 되기

일찍이 2003년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반려종 선언: 개, 사람, 그리고 중요한 타자』에서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인간과 다른 종, 종과 종 경계에서 작동하는 공진화(coevolution)를 통해 삶 정치를 풀어나갔다. 그에게 개와 함께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반려종 선언』은 해러웨이의 반려견 미스 카옌 페퍼(Ms. Cayenne Pepper)와 헤러웨이의 키스로 시작된다. 함께 살며 타액, 바이러스, 호르몬을 나누면 벡터(운반체)를 통해 서로의 신체에 상대의 유전자 절편이 재조합해 들어가는 수평적 유전자 교환이 일어날 수 있다. 일상적으로 내 얼굴을 핥는 개와 개의 털에 붙은 먼지와 함께 개 냄새를 흠뻑 마시고 사는 나 또한 말 그대로 서로를 바꾸고 있다. 동거, 함께 살기는 단순한 병존(being with)이 아닌, 확실한 ‘더불어 되기(becoming with)’다. 


해러웨이에게 모든 것은 관계다. 동물뿐만 아니라 젠더, 민족, 인종, 질병도 그렇다.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모진 2020년을 살아내니 확실히 절감하게 된다. 자연과 야만에서 벗어나 순결하고 표백된 도시에서 통제 가능한 동물이랑만 같이 사는 줄만 알았던 인간은 바이러스 질병으로 드러난 인간 사회 내부, 그리고 (바이러스, 박쥐 등) 다른 종 간의 관계망을 한참 들여다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동물, 곤충, 바이러스, 나아가 인공지능(AI)과 사이보그까지. 타자라 여겨지던 반려종들과의 더불어 되기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앞으로의 서사와 스토리텔링은 ‘저들의 세계’로부터 분리되려는 인간의 순결성과 거대 담론, 자기 제작 및 나르시시즘 대신 반려종 및 타자와의 공생을 상상하고 타진하며 숱한 곤란함과 함께 하는 일,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도나 헤러웨이(오른쪽)와 그의 반려견 미스 카옌 페퍼가 함께 있는 모습 (2006)

함께 아파하기 위해서

어느 아침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오래 미뤄두던 이 글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하던 그 날 아침, 쌀쌀해진 가을바람을 쐬니 따듯한 커피가 떠올랐다. 마침 망원동이었고, 시간 여유가 있었다. 내가 떠올린 커피는 이러하다. ‘치이익-’ 우유 스팀을 돌려 우유의 고소한 향과 풍미를 낸다. 예쁜 흰 잔에 우유를 따르고 폭신한 거품을 올린 뒤 커피를 섞어 먹는 따뜻한 카페라테. 커피 타임을 낭만적이고 은은한 한 폭의 풍경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동시에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암컷으로 태어난 한 마리 소는 2살 경부터 임신을 시작해 십수 번의 출산 직후, 또 강제로 임신을 당한다. 좁은 사육장에서 점점 무거워지는 몸으로 약 280일을 보낸 이 소는 한 마리의 아기 소를 출산한다. 태어난 아기의 몸을 핥고 떨어진 태반을 삼키자마자 아기 소는 어떤 이(인간)에게 강탈당한다. 소는 가만히 선 채로 아기 소를 위해 만들어졌던 젖을 기계에 물려 비틀어 짜이고, 또 짜인다. 나는 그 젖에 커피를 섞어 마신다. 이때 나는, 카페라테를 낭만적인 기분으로 마실 수 있을까? 


전자처럼 우유를 묘사하는 메시지는 넘치지만, 보통의 경우 후자로 상상하는 일은 드물다. 동물들의 처지. 어쩌면 전혀 모르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너무 많이 알고 싶지는 않고, 눈감고 싶고, 마음 편히 생각하고 싶은 합리화가 작동하고, 마음의 가책이 힘들어 모르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소설과 시, 문학 작품은 모르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온다. 그리고 그 세계에 머물게 한다. 아기 병아리와 엄마 닭의 이야기를 읽고, 부뚜막에 앉은 어린 송아지의 심정을 노래 부르는 일은 어린 시절의 일만은 아니어야 할 것 같다.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1973년 저서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에서 썼듯, “모든 생명은 소중하며, 인간 이외의 동물도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이다. ‘인간처럼 동물도’라는 말. 동물권을 말할 때 항상 붙는 말이다. 『무민은 채식주의자』의 광고 문구에도 있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 역시’, ‘동물에게도’ 같은 말은 인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말이지만 언젠가 동물도 인간과 닮았기에 존중받는 것이 아닌, 나와는 다른 괴상한 반려종 그 자체로 더불어 살게 되는 공존의 날을 상상해 본다. 


이 순간에도 내 개는 낮에도 바람 한 번 쐬어야 하지 않겠냐고, 끙끙거리며 애원의 눈빛을 보낸다. 개의 목과 내 손을 끈으로 연결해 산책하다 보면 신난 개는 이리저리 걷거나 뛰고, 나는 발 들이지 못할 화단 안으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럴 때면 끈을 잡은 나는 곤란해진다. 사람이 없는 곳에선 잠시 조심스레 끈을 놔두고 개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단풍이 든 나무를, 노을 지는 하늘과 구름을, 개의 엉덩이를 바라보다가 냄새 탐험을 마친 개가 근처로 오면 줄을 안에서 밖으로 요리조리 빼며 나무와 꽃, 전봇대, 울타리를 껴안아 본다.

보리(왼쪽)와 산책 중인 필자. ⓒ이야호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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