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을 잇다

전범선 대표

풀무질∙두루미출판사

맥을 잇다

전범선 대표

풀무질∙두루미출판사


맥이 끊겼다. 20세기 한반도의 문화예술은 맥이 끊겼다. 시공간이 다 끊겼다. 일단 식민지배 때문에 시간적으로 단절되었다. 문화의 근간은 말글이며, 예술의 근간은 자유다. 그런데 일제는 조선 말글을 못 쓰게 했고, 기지 국가를 만들어 자유를 박탈했다. 독창성이 숨 쉴 틈이 없었다. 일제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태백산맥에 말뚝을 박았다는 흉흉한 설이 전해졌다. 한국전쟁 때문에 공간적으로도 단절되었다. 좌우가 남북으로 갈라졌다. 문예 활동을 이어갈 풍경이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전쟁을 멈춘 뒤, 거울상 같은 독재 정권이 북남을 지배했다. 사유의 스펙트럼은 조각나고 쪼그라들었다. 남한 사람도 북조선 사람도 각자 섬에 갇힌 것처럼 살았다.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맥이 다 끊기고 빠지고 풀려서 재미가 없었다. 여러모로 갑갑한 시절이었다.

 

21세기 한반도의 문화예술은 재밌다. 적어도 남반부는 그렇다. 자유와 쾌락과 다양성이 조금씩 싹튼다. 봉준호, 방탄소년단을 빼고도 할 이야기가 많다. 부단히 서양과 일본을 따라잡아서 일부는 앞질렀다. 그 과정에서 새롭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것들이 등장했다. 아직 답답하지만 숨통은 트인다. 죽은 줄만 알았던 맥박이 다시 뛴다.

 

나는 한국의 90년대생이 미국의 비트 세대와 비슷한 역사적 조건에 있다고 본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비트 세대는 1950년대 미국의 경제적 풍요 속에서 획일화, 동질화의 양상으로 개개인이 거대한 사회조직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항하여, 민속 음악을 즐기며 산업화 이전 시대의 전원생활, 인간 정신에 대한 신뢰, 낙천주의적인 사고를 중요시하였던 사람들이다.” 오늘날 힙스터의 원조가 비트족이다. 1920년대생 시인 알렌 긴즈버그, 소설가 잭 캐루악 등은 미국사상 가장 부유하고 자유로운 시대에 성년이 되었고,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격렬히 저항했다. 대공황과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의 집단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방랑을 떠났다.

 

나 같은 90년대생 역시 한국사상 가장 부유하고 자유로운 시대에 성년이 되었다. 가난과 독재를 겪은 모부 세대의 개발 중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부정한다. 획일화와 동질화를 조장하는 소비 자본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가치 중심적인 삶을 지향한다. 그렇다고 미국의 60년대 히피 세대처럼 완전히 사회로부터 벗어나 대안 공동체를 차리지는 못한다. 기존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개별적이고 파편적으로 반발하고 방랑한다. 아마 2000년대생들은 히피 같을 것이다. 자유가 완전히 체화된 세대가 온다. 그때는 문화예술이 훨씬 더 이상하고 재밌어지겠지. 어쨌든 오늘날 남한의 청년들은 꿈틀거리고 있다. 맥이 좀 짚인다.

 

끊긴 맥을 다시 잇는 작업을 ‘재생’이라 한다. 생물학에서 재생은 “상실되거나 손상된 생물체의 한 부분에 새로운 조직이 생겨 다시 자라남”을 뜻한다. 반면 ‘부활’은 아예 죽었던 생물체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자연 세계에서 그런 일은 없다. 부활은 기적이다. 하지만 재생은 상시 일어난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것도 재생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금 한국의 문화예술도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재생을 고민해야 한다. 상실되거나 손상된 부분, 끊어진 맥락을 재발굴하고 재조명해서 다시 자라나게 만들어야 한다.

작년에 출범한 문화기획사 두루미는 재생사업에 주력한다. 우선 두루미출판사는 “좌우의 날개로 남북을 오간다”를 표어로 발족하여 공산주의 여성해방운동가 허정숙의 ‹나의 단발과 단발전후›를 출간했다. 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였고, 잡지 ‹신여성› 편집장이기도 했던 허정숙은 1925년, 주세죽, 고명자 두 동지와 함께 조선 여성 최초로 단발을 감행한다. 한국 탈코르셋 운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허정숙은 월북하여 북조선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여태껏 출판된 적이 없었다. 사상의 맥이 끊긴 것이다. 두루미는 허정숙에 이어서 장준하의 ‹우리는 특권계급의 밥이 아니다›와 정칠성의 ‹신여성이란 무엇?›를 펴냈다. 지난 세기 한반도에서 검열되고 잊혔던 사상가들의 글을 카페에서 가볍게 읽을 만한 문고판으로 엮었다. 현재 박헌영과 함석헌 등도 준비하고 있다.

 

사상의 맥을 잇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지 500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조선은 말글이 따로 놀았다. 특권계급이 한자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와 활자 매체가 불일치했다. 1988년 창간한 ‹한겨레›는 최초의 순 한글 중앙 일간지다. 비로소 한글만 쓰는 지식 생태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 91년에 태어난 나는 사실상 첫 순 한글세대다. 까막눈인 것이 전혀 부끄럽거나 불편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민중의 말과 글이 하나 되었다. 문화융성을 위한 필요조건이 한반도에 갖춰졌다.

 

한 세기 만에 지식 유통이 한자 전용에서 국한문혼용을 거쳐 순 한글로 바뀌다 보니 또 다른 단절이 생겼다. 예를 들어 나는 17세기 영국의 사상서는 원문으로 읽을 수 있지만, 고작 1970년대 한국의 사상서는 못 읽는다. 내가 영어를 하고 한자를 못 해서가 아니다. 영국은 셰익스피어 이후 언어와 문학이 함께 진화해왔고, 문법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인문학 전통이 켜켜이 축적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말글이 괴리됐고, 한글 문법도 뒤늦게 정착됐다. 허정숙을 비롯한 20세기 한반도 지식인들의 글은 대부분 국한문혼용일 뿐만 아니라, 맞춤법도 낯설어서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다. 사상 검열만큼 문자의 변화도 단절에 큰 몫을 한 것이다. 영국이 17세기 라틴어에서 영어로 넘어오며 겪었던 변화를 한국은 이제 거치고 있다.

 

무형의 맥을 잇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유형, 특히 공간의 맥을 잇는 것이다. 두루미는 그래서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을 인수했다. 지난 세기 한국은 옛것을 허물고 새것을 지었다. 서양과 물질적인 동시대성을 확보하는 데 전념했고, 성공했다. 하지만 정신적 풍요를 위해서는 변화만큼 연속도 중요하다. 뿌리 뽑힌 채, 맥이 끊긴 채, 끝없이 변모하는 상태도 흥미롭지만, 나는 뿌리 깊은 문화예술적 맥락을 계승,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멋지다고 느낀다. 오래된 공간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매일 풀무질에 들어설 때마다, 나보다 선행하고 나를 초월하는 흐름에 합류하는 것 같아 기쁘다. 외롭지 않다. 35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역사를 가진 책방이지만, 이제 겨우 서른 살인 나에게는 평생의 무게보다 무겁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성균관대 앞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은 문화기획사 두루미가 인수해 인문학 전문 서점으로서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풀무질

공간 재생이 나의 세대에게 필연적인 이유는 기후생태위기와도 직결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토건을 멈추어야 한다. 더 이상의 부동산 개발과 자연 파괴는 자살행위다. 인구는 줄어들 것이고 줄어들어야 한다. 이미 지어진 건축물로 충분하다. 차라리 없앨 것은 없애고, 살릴 것만 잘 살리면 된다. 문명의 영역을 줄이고 야생의 영역을 다시 확보하는 작업을 ‘활생’이라고 한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시 녹지를 만들자는 것이다. 도시 내에서도 우리는 무조건 신축보다 재생을 택해야 한다.


두루미는 곧 강원도의 폐교, 폐농장, 빈집 등을 재생하여 안식처를 만들 것이다. 구조된 동물을 위한 보금자리이자, 진정 생태적인 비건, 로컬 생활을 위한 체험 공간이다. 지역생산 지역 소비, 식물성 식단, 느린 삶 등 거창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여겨지는 개념들도 사실 다 근대 이전 이 땅의 삶을 일부 되찾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라이프스타일 재생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기성세대의 방식에서 이탈하는 것이 90년대생의 시대정신이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맥을 잇는 ‘재생’의 행위야말로 대표적인 저항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제 그만 좀 생산하고, 그만 좀 짓고, 그만 좀 소비하고, 그만 좀 부수자. 맥이 좀 흐르게 내버려 두어야 맥락이 생기고, 문화예술이 다채로워진다. 맥을 잇자.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도 철저히 재생적인 문화가 지속 가능한 창조의 토대를 마련해줄 것이다.

2020. 12.

17호

강원문화재단 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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