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 리뷰

명혜권

사서/번역가

속도와 거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 리뷰

명혜권 

사서/번역가


먹고 자고 일하고 운전을 하고…. 

아침 7시.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을 깨고, 자도 자도 풀리지 않는 피로를 어깨에 메고 출근을 한다. 낯선 이들과 등을 마주한 채 실려 가는 지하철에 지쳐, 출근도 하기 전 모든 의욕을 잃는다. 다시 또 반복되는 일 일 일. 바쁘고, 힘들고, 지치고, 지루하고, 알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인 채 하루를 보낸다. 열심히 살긴 하는데 뭔가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는 삶.

『잃어버린 영혼』은 그런 삶에 찾아온 ‘어느 특별한 날’에 관해 이야기한다.


『잃어버린 영혼』은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아슬아슬하게 일상을 이어가던 남자는 어느 날 출장길에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을 느낀다. 남자는 여기가 어디이고 자기가 여기 왜 와있는지….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영혼조차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바쁘게 살아가던 남자는 의사로부터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게 되고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자신의 영혼과 다시 만나기 위해 도시 변두리 작은 집에서 영혼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기다려요.

- 본문 중에서


의사는 남자에게 비정상적인 삶의 속도에 등을 돌리라고 말한다. 삶의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남자는 결심한다. 난 멈출 거야! 더 늦기 전에 영혼을 다시 만나고 싶은 남자는 며칠, 몇 주, 몇 달 동안 짧은 머리가 길게 자라고 수염이 허리에 닿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영혼을 기다린다.

ⓒ요안나 콘세이요 블로그(joannaconcejo.blogspot.com)

『잃어버린 영혼』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나뉜다. 왼쪽 페이지에는 남자가 이삼 년 전쯤 다녀갔을 오래된 레스토랑과 공원, 춤추는 사람들과 바닷가를 지나 주인을 찾는 영혼의 여정을, 오른쪽 페이지에는 잃어버린 영혼을 기다리는 외롭고 쓸쓸한 남자의 긴 기다림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여정과 기다림의 시간 속, 글은 사라지고 그림은 더없이 고요하다. 


『잃어버린 영혼』은 2018 맨부커상 수상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첫 그림책이다. 작가는 기다림에 지친 남자의 고백을 일기 쓰듯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여기에 폴란드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요안나 콘세이요의 매혹적인 연필 드로잉이 더해져 글이 미처 전하지 못한 ‘기다림의 시간’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채워 간다. 


요안나 콘세이요의 손끝에서 피어난 흑색의 섬세한 그림들은 마치 낡은 서랍 속에 넣어 둔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빈티지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또한 동유럽 특유의 눈 덮인 깊은 겨울 풍경은 쓸쓸하면서도 깊은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 실제 요안나 콘세이요는 벼룩시장에서 산 회계장부의 속지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책에는 숫자 스탬프가 그대로 찍혀 있고, 마치 반복적인 일상을 보여주듯 가지런하고 일정한 모눈이 그어져 있다. 그 격자무늬 위로 영혼과 남자의 시간이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이어진다.


남자가 영혼을 기다리는 동안 집안에는 꽃과 식물들이 자라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깥 풍경이 변하는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조용히 창가에 앉아 자유롭게 흘러가는 바깥세상을 바라본다. 그 시간을 요안나 콘세이요는 시간이 멈춘 듯 단순했던 어린 시절, 할머니 집과 같은 고요한 풍경으로 묘사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은 지루하고 따분했지만, 그 지루함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멋진 일들이 벌어지곤 했으니까.

ⓒ요안나 콘세이요 블로그(joannaconcejo.blogspot.com

영원히 둘로 갈라져 만나지 못할 것 같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하나가 된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상처투성이의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영혼을 만난 남자는 ‘얀’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영혼과 함께 자신을 돌보는 삶을 살기로 한다. 도시 변두리 회색빛 작은집은 잃어버린 어린 영혼이 돌아오면서 색색의 꽃과 초록 식물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일상을 되찾게 되고, 의자에 나란히 앉은 아이와 남자는 서로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나의 영혼에 전하는 안부

지친 하루를 보낸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 모습이 조금도 낯설지 않다. 반투명한 트레이싱지의 남자 모습 위로 나의 모습이 겹쳐진다. 책 속 주인공 남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결국 오늘을 사는 나와 닮아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득한 세상에서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감이 지금의 비정상적인 속도와 자극을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작가는 『잃어버린 영혼』을 통해 불안한 미래를 담보로 불완전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정말로 이대로 사는 것이 괜찮은지 묻고 있다.

삶의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 아직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영혼은 어쩌면 그동안 내가 돌보지 못한 내면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지치고 할퀴어져 보듬어야 할 모습이지만 그래도 만났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 본문 중에서


현대인들은 남보다 앞서야 살아남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고 있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불안정한 일자리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다. 친구보다 좋은 학교에 가야하고, 동료보다 빨리 인정받기 위해 앞만 보며 달리는 동안 내가 잃어버린 것은 진짜 ‘나’였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자기 본성을 거스르고,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도 서슴없이 하게 되는 비극적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일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영혼』에는 트레이싱지가 들어 있다. 작가는 반투명한 트레이싱지를 걷어냄으로써 자신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을 벗기고 ‘나다움’을 찾는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영혼을 다시 만난 얀은 구덩이를 파고 시계와 트렁크를 정원에 묻는다. 그러자 시계 위에서는 종 모양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트렁크에서는 몇 해 동안 겨울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만큼의 커다란 호박이 열렸다. 


시간을 쪼개어 많은 일을 하고, 장소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던 바쁜 삶은 마침내 죽음을 맞았다. 삶의 속도를 낮추자 하루하루가 새로워졌고 특별해졌다. 


꽃은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피었고, 호박 하나로도 몸과 영혼이 배부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몸과 영혼이 서로를 가꾸며 함께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혼을 찾아 나선 남자의 시선을 따라 한 장 한 장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온몸을 조이던 긴장이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다. 일상에 시달려 마음을 외면하고, 정체 모를 불안감을 안고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앞만 보며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지친 당신을 위해 삶의 속도와 방향을 돌아보게 하는 그림책이다.


인디언들은 얼마에 한 번씩 바위에 침묵하고 앉아 조각났던 영혼들이 자신에게 돌아오길 기다린다고 한다. 오늘은, 흐트러져 조각난 영혼을 모아, 영혼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책장을 넘겨보면 어떨까. 오늘 하루도 힘겹게 버틴 당신에게 속도와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큰 행복과 설렘이 찾아올 거라는 작은 응원을 보낸다. 

2021. 8.

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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