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아 작가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저자
김민아 작가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저자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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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밤을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다. 아침이 다가올 때까지 잠 못 이루는 밤에는 도리 없이 그날 보고 들은 모든 것이 밤을 이기려는 재물이 된다. 대개는 그날 일어난 일들이지만 요즘 나는 꽤 오랫동안 이야기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바로 영화 <노매드랜드>의 노매드(nomad)다. 노매드와 유사한 말은 방랑자, 유랑자, 나그네, 떠돌이, 집시, 여행객, 보헤미안, 순례자라는데 이 가운데 내게 와 닿은 단어는 유랑자다.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유랑자라지만, 물과 초목을 따라 이동하므로 정한 곳이 아주 없진 않듯 영화 속 유랑자들에게 물과 초목은 일감이다. 이들은 일감을 찾아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을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도 한다.
펀(프랜시스 맥도맨드)은 유랑 대열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다. 영화 초반, 펀은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 창고에서 일하고 있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처럼 선물을 많이 주고받는 시즌에는 상품 주문량이 폭증하지만 그래도 아마존 입장에선 한 철 장사니 상품 바코드를 찍고, 포장하고, 배치하고, 운반하면서 그 시즌만 ‘때워줄’ 임시직이 간절하다. 그때 유랑자들은 아마존과 합이 잘 맞는다. 아마존 시즌이 끝나면 그들은 탄광촌에서 석탄을 나르고, 햄버거 가게에서 고기를 굽고, 캠핑장을 관리하는 임시 매니저 역할도 한다. 언뜻 보면 다양한 ‘체험 삶의 현장’ 같은데, 이 모든 일의 공통점은 품을 팔아 삯을 받는 정직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하루치 노동을 끝내면 그들은 보금자리인 밴으로 돌아가 먹고 자고 씻는다. 그들의 집은 스쿨버스, 캠핑용 트럭, 여행용 트레일러로 다양하고 밴에 사는 사연도 제각각이지만 대개는 치솟는 집세를 감당할 수 없어서, 사업이 파산해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과 더는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붕괴의 전조는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2000년 초반, 직격탄은 2007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였다. 경기부양책으로 시행된 초저금리 정책이 독으로 작용했다. 값싼 금리는 무리한 대출을 부추겼고 부동산 버블이 꺼지자 대출자들은 원리금을 갚지 못했다. 세계대전이 유럽 몇 개국에서 시작됐지만 세계로 미친 여파로 ‘세계’ 대전이라 불리듯, 당시 미국 금융시장의 붕괴는 국제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위기라는 신약을 먹고 내성을 키운 금융경제는 변이바이러스처럼 더 거대해졌다. 암호 화폐니 디지털 화폐니 가상화폐니 이름은 달라도,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돈에 대한 사람들의 지극한 관심을 보라. 활자로 된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라는데, 옥석을 가르는 투자 혜안을 제시해준다는 재테크 서적만은 예외다. 펀이 거리에서 만난 친구들도 정확히 그 자장 안에 있었다. 그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양도했지만 그들이 마주한 건 자신이 눕게 될 병실의 침대거나 동료의 죽음이었다. 다음(next)은 기약할 수 없고, 더(more) 유예도 할 수 없는 삶. 그런 이들에게 유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사람의 일생은, 거칠게 요약하면 과업과 관계로 쌓아올린 위태로운 탑 같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과업을 달성하려 안간힘을 쓰고, 여기저기 난 상처를 못 본 척하며 관계를 이어가려 고투한다.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는 입신양명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 그저 남과 비슷하게 만이라도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러다가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새삼 깨닫는 것이다. 관계는 어떤가. 매듭을 풀려고 애쓰지만 도리어 더 단단하게 묶어버릴 때가 많고, 노력은 나 혼자만 하는 것 같아 이 관계 안에서는 나만 피해자 같다. 뜻대로 되는 건 없고, 우정도 사랑도 서툴기만 할 때, 우리는 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나무나 큰 바위 그리고 오래된 묘지처럼 굳센 것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기도 하는 것이다.
펀의 지난날은 어땠을까. 그녀는 아픈 남편을 오래도록 간호했고, 남편이 죽고 난 뒤에도 혼자서 그 집에 살았다. 펀이 살던 소도시는 석고 보드 생산으로 활기를 띠던 곳이었지만 석고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사람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사실상 무너져버린 마을이었는데 펀은 왜 떠나지 못했던 걸까. 말을 아끼는 그녀가 길 위에서 만난 친구 밥 웰스에게 털어놓은 속내는 이랬다. 나마저 그곳을 떠나(오)면 거기 나와 남편이 살았다는 흔적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고. 그런 펀이 어느 날, 그 한 줌 미련에도 종지부를 찍고 꼭 필요한 몇 가지만 밴에 실었다. 그날부로 펀은 마침내 한뎃잠을 자는, ‘구르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남편은 떠났어도 펀에게는 여전히 잔소리하는 가족이 있다. 부초처럼 떠도는 동생이 언니는 안쓰럽지만 펀은 언니에게 걱정 붙들어 매란 말조차 하지 않는다. 걱정이 언니의 일이라면, 언니는 언니의 일을 해. 꼭 그런 뜻일 것만 같은, 말 없는 말을 남기고 펀은 다시 길 위에 오른다. 그렇다면 펀은 냉담하고 무심한 사람인 걸까.
어느 날 펀은 같은 동네에 살았던 모녀를 마트에서 마주친다. 펀이 가르쳐준 시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소녀는 펀과의 마주침이 반갑지만 궁금한 마음이 더 컸던지 참지 못하고 묻고 만다. “아줌마 홈리스예요?” 그러자 펀은 “아니, 나는 홈리스가 아니야, 하우스리스야.” 낯선 이에게 하듯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펀의 말을 이렇게 들었다. “나는 주택으로서의 집(house)이 없는 것이지 기억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가정으로서의 집(home)은 차고도 넘치는 사람이야.” 펀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 기억되는 한 살아있는 거라는 믿음을 자주 ‘새로고침’ 하는 사람이고, 지나간 연(緣)은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펀은 사람에게 무심하거나 냉담한 게 아니라 그저 기억을 잘 간직하려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도 펀처럼 모두 헤어질 사랑을 하고 있거나, 헤어진 사람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더 나이 들어선 아끼는 기억을 하나씩 꺼내 보며 살아갈 테지.
펀은 누군가 불을 켜주길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밝힌 등을 들고 걷는 사람이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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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달리다가도 멈추고 싶은 게 또 사람이다. 펀은 길 위에서 자꾸만 마주치다 조금은 가까워진 데이브가 싫지 않다. 자신을 은근히 챙기는 데이브의 따스함에도 마음이 끌린다. 그런 데이브가 유랑을 접고 자신의 밴을 주차장에 세운 채 천막을 덮었다는 건, 이제 한동안 떠날 생각이 없거나 앞으로는 집에 머물겠다는 의미리라. 펀은 언제 한 번 놀러 오라던 데이브의 말을 간직하고 있다가 데이브를 찾아간다. 데이브의 가족은 아버지의 ‘여사친’을 환대하는데, 그 온기에 펀의 몸과 마음은 비누 녹듯 풀린다. 바로 그때 데이브는 펀에게 고백한다. 당신이 이곳에 있어 주면 좋겠다고. 당신이 좋다고. 펀은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 그날 밤 데이브와 아들이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몰래 바라보던 펀은 어스름한 새벽, 도둑처럼 그 집을 빠져나온다. 집이 주는 안정감을 훔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으니 펀은 실제로 그때 흔들리는 도둑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야 알았다. 펀과 데이브만이 노매드를 연기하는 배우였다는 걸. 펀이 길 위에서 만난 스웽키, 밥 웰스, 린다는 실제 노매드였는데, 그들은 또 펀이 그토록 유명한 배우인 걸 몰랐다 한다. 극중에서 펀이 죽은 남편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이 있는데, 카메라가 꺼진 후 밥 웰스는 펀에게 다가와 더할 수 없는 위로를 건넸다 하니 그렇게 극 같은 인생, 인생 같은 극이 이 영화 <노매드랜드>다. 제작진은 미 서부의 대자연과 마을들을 반년 넘게 오가며 촬영했다는데 그래선지 스크린 안에는 노을 지는 저녁, 모래를 일으키는 바람, 실오라기 하나 없이 물속에 몸을 맡긴 펀의 영혼이 손에 만져질 듯 너울댄다.
충분히 외로울 준비가 돼 있다고 자부해왔는데도 돌아보면 늘 갈대처럼 흔들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꼿꼿할 자신이 없으니, 흔들리면 여전히 살아있는 거라고 마음을 바꿔 먹기로 한다. 달리다 멈추고 다시 달리는 유랑의 삶이 사는 일의 본질임을 일깨워주는 노매드들. 누군가는 여전히 영화 속 유랑자들을 삶의 궤도를 이탈한 방랑자나 부적응자라 부를 수도 있다. 허나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순 없으리라. 궤도를 이탈한 행성도 별이듯 이들은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unable) 게 아니라 오로지 의지로써 주목할 만한(notable) 삶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길 위를 구르는 관록으로, 관성에 지지 않는 이들은, 오늘도 스스로가 그린 인생 지도를 들고 자신만의 생을 운행하고 있다.
달리는 집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 있을 터. 우리는 이제 비움으로써 삶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