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람의 일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황재형: 회천回天》

한승은

「잇다」편집부

결국 사람의 일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황재형: 회천回天》

한승은「잇다」편집부


황재형이 그리는 공간은 아득하다. 그 아득함은 곧 시간이다. 화면을 바라보는 눈은 어느 한 곳과 어느 한 때에 머물지 않는다. 그림 앞에서 다리의 무게중심을 바꾸고 고개를 갸웃하고 눈망울을 굴리는 작은 몸짓에 공간의 변화와 시간의 변화가 스민다. 황재형은 '태백'에 쌓이는 '시간의 두께'를 그린다. 1982년 그가 태백에 정착하고 근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탄광촌은 폐광촌이 됐고, 광부가 떠난 자리는 관광객이 머물다 가는 변화가 있었다. 참 많이 변했지만, 그 소란스러움이 무색한 폐광촌의 무성(無聲)은 기록할 수 있는 역사라기보다 말 못 할 사연을 품고 있다. 


오랫동안 '쥘 흙과 뉠 땅'1)으로 모인 그의 그림들은 이제 ‘회천(回天)’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품었다. 어떤 국면으로 나아가 어떤 힘을 회복하겠다는 것일까? 하늘의 뜻을 닮은 땅의 의지를 회복하겠다는 진정한 마음의 회복이 필요한 지금. 이 원대한 꿈과 포부는 얼핏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황재형의 그림들은 그 꿈과 포부의 구체적이고 초현실적인 지평을 보여준다. 때로 지극히 사실적인 그림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림 같은 풍경처럼 비현실적인 그림은 그렇게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휘발한다. 이러한 한편 황재형의 극사실적인 그림은 진짜 같은 그림이기를 넘어선다. 벗어놓은 옷가지와 마른 농작물은 알 길이 없지만 알 것 같은 사연을 내비치고, 담담한 눈동자와 깊게 팬 주름은 묵묵한 노동의 흔적으로 다가온다. 오늘의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내일의 현실에 손을 뻗는 극(劇)적인 그림들. 이 그림들은 막장에서 입구로 돌아오는 길목에 걸린 이정표와 같다.      



초현실적인 삶의 민낯, 삶의 초현실적인 민낯

황재형은 사람과 사람을 품은 환경을 그린다. 그리고 그림의 재료와 방식은 그가 사람과 환경을 대하는 마음의 연장(延長)이다. 황재형은 유화물감 말고도 흙, 석탄, 머리카락 등을 쓰고, 한 폭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십여 년의 시간도 마다하지 않을뿐더러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접착제로 붙이는 수고를 감내한다. 자신의 그림이 그림 속 대상과 연대하길 바라는 화가의 노력은 삶에서 얻은 재료와 고된 작업 방식으로 표출된다. 

황재형을 태백으로 이끈 <황지330>(1981)은 숨진 광부의 작업복에 실린 무게를 담았다. 옷걸이에 걸린 옷자락은 중력에 못 이겨 아래로 늘어져 있다. 가슴팍에 달린 신분증은 무게랄 것도 없이 가볍겠지만, 중력을 이기지 못하는 옷이 이기지 못하는 또 다른 힘을 암시하는 듯 그늘에 숨었다. 낡고 해졌으나 익숙한 비누 내음이 날 것 같은 옷은 그리 무겁지 않을 텐데 무거워 보인다. ‘쌍방울’이 적힌 상표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닳은 옷감의 부드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지독한 묘사에서 삶을 알아챘기 때문만은 아니다. 쪼개진 나뭇결이 눈, 코, 입을 대신하는 얼굴에서도, 진짜 같은 가짜 미끼의 그림 뒤로 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물러나 있어도(<메탈지그와 선탄부> 2004-2009),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생활을 내세우지 않아도 보이는 삶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황지330, 1981,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메탈지그와 선탄부, 2004-2009, 캔버스에 유채, 작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뜻하지 않은 삶의 노정

지난 6월 말, 태백시에서 철암역두선탄시설 무료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지어진 이 시설은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로 지금도 가동하고 있다. 태백과 정선 등지의 탄광 곳곳이 문을 닫으며, 탄광촌은 폐광촌으로, 폐허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와중에도 무연탄 선탄과 수송을 멈추지 않은 철암역두선탄장은 강원 산간지역 탄광촌의 명맥을 잇는 상징적 존재로 생존해왔다. 여전히 쓸모 있는 선탄장은 탄광촌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는 한편 철암에도 불어닥친 개발 바람은 탄광촌이 이미 사라지고 있음을 내비쳤다. 탄광촌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석탄으로 먹고산다는 말이기도 할 텐데, 철암 사람들은 현재의 선탄시설에 기댄 한편 과거의 탄광촌에 기댔다. 옛 탄광촌에 기댄 이들은 크게 개발 바람을 피한 과거의 모습에서 미래를 보는 쪽과 개발 바람을 타고 철암을 떠나려는 쪽으로 나뉘었다. 첫 승은 후자가 거뒀다. 2000년대 후반 철암역 앞 4차선 도로가 들어서면서 <철암역>(1994-2006)의 풍경은 더는 보려야 볼 수 없는 과거의 한 장면이 되었다. 이러한 한편 2010년대에 접어들어 역 부근에 탄광역사촌이 조성되면서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 사람이 떠난 곳에 다시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해 행정 당국이 떠올린 방안은 도로를 넓히고, 새 건물을 짓고, 관광자원을 캐내는 데 불과했다. 한쪽에는 관광지가 조성되기 위해 공사 중인 폐허가, 다른 한쪽에는 침식되고 풍화되는 옛 탄광촌의 폐허가 자리했다. 황재형은 이 두 가지 폐허를 모두 화폭에 담았다. 


<철암역>은 행인의 발길과 각종 탈것의 바퀴 자국에 질척해진 눈길을 연상시킨다. 행인의 옷차림으로 보건대 그림의 계절은 겨울이 아닌 듯하지만, 눈으로 만지는 그림의 대기는 한참 만에 눈이 그친 어느 오전의 찬 공기다. 폐광촌에 개발 바람이 불어오기 전 시간이 켜켜이 내려앉은 가게들과 마주 보는 역 앞 높은 기둥에는 새마을운동의 유산으로 추정되는, 칠이 상당히 벗겨져 나간 글씨가 적혀 있다. 한때 석탄과 함께 새롭게 거듭나기를 꿈꾼 마을은 석탄의 꿈이 빛바랜 자리에 또 다른 새마을의 객기가 스며드는 걸 막지 못했다. 


쌓인 눈이 바람에 날려 공중을 부옇게 부유하듯, 철암과 고한(<고한2011> 2011)과 또 다른 옛 탄광촌들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눈앞을 흐렸다. 이미 눈앞이 흐린 이들이 몰고 온 바람은 옛 탄광촌을 현 폐광촌으로 명명하고, 문 닫힌 마을은 아주 폐기하고 새마을을 사라고 부추기는 객기였다. 그 객기를 포착한 장면은 보도사진처럼 고발한다. 현실을 고발하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포착된 장면의 고발을 알아차리는 건 보는 이의 몫이다. 그러나 콘도가 들어선다는 광고를 지나치는 사람도, 을씨년스러운 적막을 살아내는 사람도, 이들이 등장하는 그림을 보는 사람도 무지한 개발이 인지된 고발보다 힘이 센 현실에 매여 있다.

<철암역>, 1994-2006,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고한 2011>, 2011, 캔버스에 유채, 작가 소장

전시장 전경.

삶이 보이는 자리

맞붙은 지붕들이 한없이 펼쳐져 있고, 산세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첩첩 이어진다. 지붕보다 높은 빨랫줄에 걸린 빨래,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밝힌 불빛. 높은 데서 보이는 것이든 보는 것이든, 이 시선은 새나 구름의 것이 아니라 땅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는 사람의 것이다.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높이와 내려다볼 수 있는 시야는 대개 물리적인 경험을 가공한 결과다. 높은 데서 내려다본 기억을 떠올리며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그림. 황재형은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마음으로 빛바랜 옛 탄광촌과 사람의 온기가 세 든 산자락과 그 산이 굽이굽이 물결치는 산맥을 그린다.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마음은 버려진 창고 앞에서 껌으로 풍선을 부는 소녀와 이마에 달린 랜턴보다 빛나는 얼굴을 그리는 손이다. 그림 속 사람이 캔버스를 감싼 포장에 머물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동네 미용실을 돌며 모은 머리카락으로 그린 그림은 아득하고 아득하다. 그 수많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기록된 삶의 시간과 미용실에 모인 사람들의 시간과 화가가 미용실을 돌며 머리카락을 모으는 시간과 머리카락으로 형태를 잡고 명암을 표현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지난한 시간의 그림은 그림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연대하는 바람을 품은 땅이다.


어두운 방에서 밝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온통 흰 공간의 중심에 자리 잡은 <메탈지그>(2021)는 낯설다. 전시장 입구 가까이에 걸린 <메탈지그와 선탄부>를 떠올리며 이 거대한 가짜 미끼의 주위를 도는 동선. 그 주위를 돌며 가짜 미끼의 번들거리는 몸체를 훑어보고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는 조건. 가짜 미끼와 그림 사이의 거리는 그림을 마주하기도, 가짜 미끼를 마주하기도 애매한 폭이다. 그리고 그 애매한 거리 어딘가에 있는 나의 자리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낯설고, 내가 그 기름과 물의 경계면이 된 듯 불편하다. 도시락에 든 석탄밥(<도시락> 1981)이 그 주위를 둘러싼 그림 속 광부와 광부의 아이들과 노을 지는 탄천과 한데 어우러진 것과 달리 그 어우러짐을 뒤늦게 알아차릴 만큼 낯설음이 인상적인 환경은 작품의 위치 때문인지, 조명 때문인지, 동선 때문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조건을 감춘 채 뒤에 남는다. 미끼라는 것 그 자체로 이미 불편한데 가짜라니, 게다가 쓸데없이 커서 더욱 불편한 걸까. 무엇을 낚기 위해 미끼가 던져지는 것인지도 의아한데, 거대한 조형물로 거듭나 미술관에 던져진 미끼는 무엇을 낚으려는 것일까. 어두운 방으로 돌아와 입구와 같은 출구로 나오는 길에 다시 만나는 <메탈지그와 선탄부>는 크든 작든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도는 가짜 미끼를 그 끝에 달린 갈고리와 똑 닮은 물음표에 부친다. 진짜 같은 가짜의 현실은 그 현실과 맞닿은 가짜 같은 진짜의 현실을 압도한다. 속이기 위해 존재하는 가짜는 믿기지 않는 삶의 실체에 비해 한없이 가벼운 한편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다. 

어머니, 2005, 캔버스에 흙과 혼합매체, 가나문화재단 소장

우리는 늘 속아 넘어갑니다(소가 넘어갑니다), 2012-2018, 캔버스에 머리카락, 작가 소장

전시장 전경 ⓒ서스테인웍스

전시장 전경 ⓒ서스테인웍스

이미 끝을 본 사람에게 아직 보게 될 끝이 남아 있다면, 그 끝은 무엇일까. 보게 될 끝은 없어도 봐야 할 끝은 남아 있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황재형은 이미 끝을 본 사람들이 치닫는 막다른 끝이 있다는 걸, 끝이 거듭되는 끝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 앎을 관조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돌아온다. 갱도의 처음과 끝, 입구와 출구는 분명 다른 한편 다르지 않았다. 탄광촌과 폐광촌이 한자리에 머물 듯, 산골짜기와 산마루가 늘 같은 자리에서 나이를 먹듯 처음과 끝이, 입구와 출구가 하나인 동선은 어떤 현실의 패턴이다. 돌고 도는 처음과 끝이 구분 없는 삶에서, 처음을 바라보고 끝을 바라보는 자리에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입구에서 바라보고 출구에서 바라보는 자리에 걸린 그림들. 내 마음이 체가 되어 거른 현실이 투사된 방.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황재형의 그림에서 보는 일단(一端)에 그 처음으로, 입구로 돌아오는 사람이 담겨있다.


1) 황재형이 밝힌 ‘쥘 흙과 뉠 땅’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성실한 이웃의 상장처럼 받아놓은 몇 사람의 기침 내음. 그것에 값하는 예술은 도덕성의 환기, 진실성 획득을 위한 노력이었을까. 나의 주제 중 쥘 흙은 일의 주체인 내 본질이고, 뉠 땅은 역사와 현실이다. 이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희생으로부터 재기를 위해 노동은 죽음이 아니라 떳떳이 이 땅에 서는 것이라고 땀의 무게와 깊이를 삶의 구체적인 넓이가 보이는 전망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윤철호, 「쥘 흙과 뉠 땅을 찾아 태백을 넘는 화가 황재형」, 월간 『사회평론·길』, 1983년 10월호, 38쪽.

202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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