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시내
영화평론가
손시내
영화평론가
<풍경>(2013)은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여기엔 국적, 성별, 직업, 종교가 다른 1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이 그리워하는 고향은 동티모르, 스리랑카, 베트남, 필리핀, 방글라데시, 네팔, 태국, 캄보디아, 중국, 우즈베키스탄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고, 이들의 일터 또한 염색 공장에서 비닐하우스 농장, 도축장에 이를 만큼 폭넓다. 낯선 땅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생활양식과 부딪치면서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 외에, 이들 사이에 별다른 접점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방인의 위치야말로 이들의 가장 커다란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풍경>은 서로 별다른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들과의 개별적인 인터뷰와 주관적 장면들의 배치를 통해서 그 커다란 공통점을 영화 안에 어렴풋이 그려보려고 하는 작품이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 그렇지만 현재 나의 일과 일상이 있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타자화되는 공간, 바로 그곳에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 담아내고 또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가 담아내는 노동의 순간들. ⓒ인디스토리
그러한 질문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풍경>은 한국 사회 이주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떤지 엄격하게 따져 묻거나, 이방인의 삶을 섣부르게 낭만화하는 식의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영화는 관찰자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인물들의 일터와 생활공간을 담는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선 인물들에게, 한국에 오게 된 계기나 그동안 겪은 어려움을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진다. 한국에 와서 꾼 가장 인상적인 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미래의 소망을 의미하는 꿈이 아니라, 잠잘 때 꾸는 꿈 말이다. 이때 인물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의 말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태도는 일면 정중하다고까지 느껴진다.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사정을 대화 몇 번으로 전부 알 수 있다고 여기지 않고, 어떤 답이라도 이끌어내기 위해 속내를 파고들지도 않는다. 존중과 겸손이 읽힌다. 그런데 동시에 이러한 선택이 창작자의 윤리적 태도일 뿐 아니라, 영화가 제작된 배경과도 어느 정도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짚을 필요가 있다.
<풍경>은 장률 감독이 전주국제영화제의 제안을 받아 ‘이방인’을 주제로 만든 단편 영화 <풍경>을 장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당시 영화제 측에서는 몇몇 감독에게 ‘이방인’에 관한 영화 제작을 의뢰했다. 그때까지 극영화만을 만들었던 장률 감독은 영화의 모양을 고민하다가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택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장률은 연변에서 태어난 재중동포 출신으로, 중국 등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풍경>에 이르기 전까지, 그의 작업은 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거나 정체성의 문제를 마주하는 경계인을 그리는 데 집중돼 있었다. <망종>(2005)에선 아들을 데리고 중국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조선족 여성의 모습을 담았고, <경계>(2007)에선 북한을 탈출해 몽골 초원을 떠도는 모자의 고단한 행로를 그렸다. 그런 그에게 ‘이방인’이라는 단어는 감독 본인의 위치를 상기하는 주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풍경>은 이방인이자 경계인인 어느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극영화가 아니라 관찰자의 다큐멘터리로 완성됐다. 그즈음 한국에 정착하게 된 감독의 눈에 한국 사회 속 이주노동자의 풍경이 비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촉박한 제작 기간이 카메라를 타자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러한 조건 덕에 <풍경>은 삶과 장소에 관한 고민을 품은 영화가 됐다.
다시 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시간이 넉넉히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인터뷰만으로 사람들의 속사정과 내밀한 이야기를 온전히 듣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장률 감독은 인터뷰이들이 다른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않았지만, 인상적인 꿈을 물었을 때는 잠시 생각에 빠진 다음 웃고 긴장이 풀린 채로 진실하게 답했다고 말했다. ‘인상적인 꿈’을 묻는다는 것은 분명 독특한 선택이고, 인물들의 답변도 충분히 흥미롭다. 누군가는 모국어로, 누군가는 영어로, 또 누군가는 한국어로 이 질문에 답한다. 또한 이들은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한국에서 만난 이들을 자신의 모국으로 데려가 멋진 풍경을 보여줬다는 이야기, 고국의 보고 싶은 가족들을 다시 만난 이야기, 실제로는 가본 적도 없는 제주도에 갔다는 이야기, 그저 벗어나고 싶은 악몽만 자꾸 꿨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들이 들려주는 꿈 이야기는 그 자체로 단순하고도 복합적인 사회문화적 텍스트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거주하는 물리적인 공간과 개인적 의미를 갖는 장소 사이의 괴리가 이 꿈 이야기에 새겨져 있다. 이를 몸이 있는 곳과 마음이 있는 곳의 분리, 내가 보는 풍경과 보고 싶은 풍경의 차이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꿈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주관적 이미지. ⓒ인디스토리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단순 여행객이 아니며, 이들의 삶엔 경제적인 문제와 차별적 시선이 깊이 관여하고 있기에,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괴리의 어려움은 단순히 ‘거주지의 이전’과 같은 테마 이상으로 의미화되어야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선, 실제로 그 삶을 살아가는 14명의 인터뷰이에겐 그러한 분석의 언어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이 가진 언어는 꿈이다. 그것을 다루면서 영화 또한 굳이 분석적 언어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건 영화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풍경>은 카메라에 비친 풍경들을 정직하게 나열하고, 카메라의 정제되지 않은 움직임으로 주관성을 드러내며, 꿈 이야기로부터 연상되는 장면을 자유롭게 배치하면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나간다. 이러한 선택이 생성하는 효과는 이중적이다. 그게 어디든, 사람들이 일상을 만들고 삶을 일구는 곳은 이름 없는 공간이 아니라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된다는 믿음이 한 편에 있다. 다른 한 편 여기에는 그러한 삶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사회가 어떤 이들에게는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공간임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도 있다.
<풍경>은 이주 노동자들의 삶 그 자체를 풍경으로 포착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개별적인 차이를 뭉갤 만큼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채 바라보는 그 풍경은 부단한 움직임으로 채워져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일터에서 땀 흘려 일하고, 일상을 나누는 이들과 삼삼오오 모여 저녁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믿는 신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땅이란 분명 중요한 요소이지만, 삶의 장소, 공동체의 터전이라는 것이 특정한 물리적 공간의 속성만으로 만들어지고 설명되는 건 아닐 것이다. 의미가 있는 장소란 오히려 구체적인 관계와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고 활성화되는 것이다. 공간을 실제로 살아내고 그곳에서 일상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이름 없는 공간은 비로소 구체적인 장소가 된다. <풍경>의 카메라는 여러 형태의 노동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결혼식이나 기도와 같은 의례를 차곡차곡 담아낸다. 그 순간, 영화에선 낯선 땅을 자신들의 장소로 바꿔놓는 정직한 힘에 대한 존중이 느껴진다.
낯선 공간에서 이어가는 종교적 실천. ⓒ인디스토리
하지만 <풍경>은 오직 그러한 장면들만으로 채워진 영화가 아니다. 몇몇 꿈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인터뷰이들이 겪은 한국에서의 노동 환경은 대체로 고단할 뿐 아니라 위태롭고 부당하기까지 하다. 꿈과 현실이 똑같이 나쁘다는 어떤 이는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풍경>의 매우 흥미로운 점은 인물들의 인터뷰와 그들의 일상에서 채집된 장면들 사이사이에 자유 연상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심어놓는다는 데 있다. 그건 안개가 잔뜩 낀 도로를 달리는 이미지이기도 하고, 꿈속에서 제주도에 가봤다는 남자의 말에 덧붙이는 실제 제주의 풍경이기도 하며, 사람이 없는 텅 빈 공간에서 그네나 자전거가 홀로 움직이는 기이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 이미지들은 왜인지 손에 잡히지 않고 몸에 붙지 않는다. 아득하고, 멀고, 위태롭다. <풍경>은 한편으론 인물들의 구체적 삶을 나열하며 공간을 장소화하는 움직임을 포착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주관적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위태롭고 불안한 조건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사이의 긴장을 무시하거나 억지로 삭제하지 않는다는 데 이 영화의 미덕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풍경>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을 단순히 이상화하거나 연민하는 함정에서 벗어난다. 영화는 다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왜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장소를 만드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그 자체로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할 수 없는가. 영화가 마지막까지 품고 있는 이 모순은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