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문화로, 더 지역으로 향하는 문화예술교육 

강정지
춘천문화재단 문화정책팀장


더 문화로, 더 지역으로
향하는 문화예술교육

강정지
춘천문화재단 문화정책팀장


작년 이맘때쯤 재단에서 문화예술교육 특강이 있었다. 강사는 조명등을 껐고 하얀색 스크린 벽 위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쓴 『질문의 책』의 시구가 한 줄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엉뚱한 상상력 같기도 하고 철학자의 깊이 있는 질문 같기도 한 여러 시구 속에 내 마음을 ‘쿵’ 내려앉게 하는 한 문장을 보았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나였던 그 아이, 기억의 저편에 동요 가사처럼 ‘동구 밖 과수원길’을 놀이터 삼아 달음박질치는 말괄량이가 있었더랬다. 긴 장대를 들고 풀숲을 헤치는 다부진 소녀 곁으로 잠자리, 청개구리, 메뚜기떼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껏 날아올랐다. 허공으로 흩어진 존재들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무척 파랗고 차갑고 따뜻했다. 그리고 조금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당시 나는 갑자기 솟아난 복잡한 감정들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후에 하나의 감각이 동시에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공감각적 심상임을 알게 됐고, 내가 그것을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했음을 깨달았다. 느닷없이 찾아온 감각의 확장,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그 갑작스러운 경험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방금 일어난 일인 듯 생생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언어가 가리키는 틀 안의 표현들이 익숙해지는 사이 분명 나였던, 일곱 살 아이는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어쩌면 그 느닷없이 찾아온 감정이 나를 늦게나마 문화적인 토양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현재 일터로 삼고 있는 지역문화재단은 예술가, 기획자, 행정가 등 다양한 이름의 개체들이 저마다 독특한 감수성을 지니고 지역 문화서식지를 지탱하고 있는 곳이다. 그 문화적 힘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코로나19 팬데믹, 잇따른 화재와 홍수 등 재난적 상황에서도, 닫힌 공연장과 전시장을 대신하여 더 지역으로, 더 마을로 작게 스며들어 시민들이 문화생활에서 소외되지 않는 환경을 조성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교는 완전히 문을 닫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 교안과 프로그램을 준비했던 교·강사들은 오프라인 교육 환경을 급하게 온라인 또는 대면 활동이 가능한 소규모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지역사회를 비롯한 행정은 재난에 대응하기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그것은 교·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헤매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다행히 어려운 때일수록 문화 안전망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교·강사들이 있었다. 이들, 30여 명에 달하는 교·강사들은 '모의주행'이라는 라운드테이블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춘천문화재단

‘포스트 코로나, 문화예술교육 뉴노멀’을 주제로 이 시기 필요한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이어갔고, 그 결과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디서 가르칠 것인지’에 집중되었던 이야기들은 점차 ‘동네 안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로 바뀌어 갔다. 

환경이 변했다는 걸 인식하면서 비로소 주어진 교육 활동과 프로그램이 아니라 대상이 요청하거나 그에게 필요한 활동이 무엇인지 생각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형화된 교실, 프로그램, 차시, 가이드라인에 매여있던 그들의 전문성과 창의성이 ‘사회적 돌봄’이라는 과제에 근접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지난 한 해 문을 닫은 학교를 대신하여 학교 밖 시설, 마을 단위 활동으로 만난 참여 학생과 학부모 수는 약 2,000명에 달한다. 주말반, 방학특집반, 방과후반 등 여러 그룹으로 운영한 모든 수업 차시만도 약 500회가 넘는 꽤 적극적인 활동이었다. 

다행히 올해는 학교 문이 열렸지만, 교·강사들은 학교 밖, 마을 활동을 멈추지 않은 것은 물론 계속 확장해 나가고 있다. 실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그래서 '모의주행'이란 제목을 달 수밖에 없었던 포스트 코로나 문화예술교육 라운드테이블은 교·강사들이 주체가 되는 자율주행의 서막이 되었다. 

현재 춘천의 문화예술교육은 지역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일상적으로 문화예술교육을 경험하며 표현력, 창의성, 주도성을 길러 문화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교과 내용 또는 마을의 자원을 예술 장르와 접목한 다양한 활동을 추진 중이다. 우리 미래 세대의 아이들이 그저 텍스트에 갇힌 세계를 보지 않도록, 어른이 되어도 ‘나였던 그 아이’를 쉽게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변화의 바람, 교육의 틀 깨기  

사실 근 2년간 이어진 재난 상황 이전부터 문화예술교육 지형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최근 수년간 분권적·자율적 사회구조가 가속화되며 시 정부가 시민성과 숙의민주주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민자치, 시민교육, 마을공동체 조성사업 등을 주관하는 마을자치지원센터를 포함한 다양한 중간지원조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성적으로 추진해 오던 문화예술교육 또한 바로 이 시기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민의 문화적 욕구와 지역 의제를 발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충족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풀뿌리 문화예술교육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생겨난 것이다.

동시기 ‘교육의 틀’ 깨기 욕구와 자치분권의 흐름 속에서 재단은 시민 스스로 마을 의제를 발굴하고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주도적, 자치적 욕구를 확인하며, ‘삶-문화예술-공동체-주민자치’라는 키워드를 포괄하는 지역 문화예술교육의 전환적 가치를 모색하게 됐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주민자치’라는 키워드다. 춘천은 최근 마을계획을 주민 손으로 직접 결정하는 참여자치의 서막을 열며 동별로 주민총회를 개최하고 있다. 주민총회는 다음 연도 주민참여예산 사업 신청을 위해 마을별 주민자치회에서 마련한 마을의제를 전체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결정하는 자리다. 중앙이나 정치권발 거대담론보다 자신의 안전과 행복, 이해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주민, 당사자성을 가진 주체적 시민이 출현한 것이다.

재단은 이러한 주민자치 흐름에 발맞춰 지난해 춘천시 마을자치지원센터와 협력하여 최근 2년간 주민총회에서 탈락한 의제 중 문화적 되살림이 가능한 지역 의제 또는 주제 중심으로 통합 문화활동을 기획하는 워크숍 '가치 안은 배움터'를 추진하였다. 

'가치 안은 배움터'는 ‘같지 않다’라는 맥락을 갖고 있다. 같진 않지만, 생각의 결과 추구하는 활동이 유사한 다양한 주체들을 한데 모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예술인, 마을활동가, 주민자치위원 등 소속된 곳은 모두 달랐지만 활동의 층위와 맥락이 유사한 38명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치 안은 배움터' 워크숍 현장. ⓒ춘천문화재단

워크숍은 코로나 시국으로 활동 공백기를 맞이한 예술가, 활동가를 대상으로 5일간, 하루 6시간 이상 진행하는 집중 과정으로 편성됐고, ‘삶-문화예술-공동체-주민자치-통합문화활동’을 아우르는 폭넓은 주제 영역을 다루었다. 참가자들은 여러 층위에서 배우고 해석해보는 가운데 지역 문화활동을 새롭게 전환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탈락한 주민총회 의제 중 참가자들이 각색한 문화적 의제는 다음과 같다. “횅한 춘천역 주변을 시민들이 춤추는 공간으로 만들자”, “마을의 폐가를 동네 문화공간으로 활용하자”, “소양2교 삭막한 하부공간을 문화공간으로 가꾸자” 등. 모두 삶과 가장 가까운 주제들이다.

참가자들은 과연 각개의 의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의제들을 예술적인 형태와 활동으로 전환해 낼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어떤 거버넌스가 작동되어야 하는지와 같은 다양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이들은 문제를 바로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충분히 숙의하는 과정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이 지닌 가치를 충분히 내재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문제와 현상을 직시하는 좋은 질문이야말로 예술교육의 힘이 아닐까.

서로 다른 예술 장르를 결합하고, 학습자의 예술적·감각적 경험을 통합하는 데 그쳤던 기존의 예술교육이 다양한 영역의 활동 주체와 삶의 현장을 만나 마을 문제까지 인식하게 된, 의미 있는 변화의 지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변곡점, 더 문화로 더 도시로  

최근 춘천에는 또 하나의 변곡점이 있다. 춘천은 올해 문체부 지정 법정문화도시가 되어 지역 내 어디서든 10분 내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이른바 ‘10분 문화생활권’을 목표로 문화도시 조성에 나섰다.

재단은 문화도시 조성사업과 문화예술교육의 협력을 통해 시민들이 삶터와 가까운 곳에서 문화적 활동과 환경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시민의 문화예술 접근성을 높이고자 한다. 재단의 비전대로, ‘더 문화로, 더 지역으로’ 나아가 도심과 외곽의 문화격차를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춰 향후 5년간 다층적 활동을 지원하고 환경기반 조성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춘천은 앞으로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학교에서 학교 밖으로, 더 마을 안으로 공간을 확장하고, 예술가와 마을활동가가 함께하는 것은 물론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아우르며 세대를 확장하고자 한다. 나아가 문화예술교육이 춘천형 돌봄 일자리를 창출하는 가능성도 모색하고 있다. 문화도시 조성사업을 계기로 춘천의 문화예술교육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미적 체험’에 치중한 교육에서 사회적 문제(돌봄, 안전, 기후위기 등)를 고민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예술교육은 사회의 문화적 성장과 성숙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동력이다. 사회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문화예술 활동에 나서는 시민이 더 많아지기를, 문화예술교육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지역이 더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2021. 11.

19호

강원문화재단 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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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 033-240-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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