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살리는 지역 문화거점 
— 독일 TRAFO 변화 프로젝트 현장

한승은
「잇다」 편집부

지역을 살리는 지역 문화거점

─ 독일 TRAFO 변화 

프로젝트 현장

한승은
「잇다」편집부


일찍이 지방자치가 자리 잡은 독일은 문화자치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중앙과 지역, 도시와 시골(ländlich geprägte Regionen)의 문화 격차는 여전히 크다. 인구가 줄며 직면한 사회 위기는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지만, 위기에 대응하는 역량과 여력의 차이는 분명하다.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내실은 물질적 풍요로움보다 정서적 풍요로움에 달려 있다.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삶이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당연한 것과 달리, 농산어촌은 물론 중소도시에서도 당연하지 않은 현실은 당장 도시보다 시골이 먼저 붕괴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독일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수가 시골에 살고 있는데도, 시골의 일상에서 문화예술이 기본값이 되게 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독일연방문화재단(Kulturstiftung des Bundes)에서 출범한 지역문화 발전 계획 ‘TRAFO-변화하는 문화를 위한 모델(TRAFO-Modell für Kultur im Wandel)'은 정부가 도시와 시골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시골의 더 나은 미래를 일구자는 큰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문화예술이 빠질 수 없음을 직시한 덕분에 등장했다. 2015년 출범한 TRAFO는 지난 6년간 농산어촌 지역 4곳에서 올해 지원 종료 예정인 ‘변화 프로젝트(Transformationsvorhaben)’를 이끌어왔다. TRAFO 출범 후 독일 내에서 지역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기조가 두드러진 데다 마침 변화 프로젝트가 순항하면서 2018년 TRAFO는 다른 7개 지역을 선정해 두 번째 변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TRAFO

TRAFO는 프로젝트 지역에 재정을 비롯한 물적 자원과 활동가, 연구자, 예술가 등으로 이루어진 매개 인력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시골을 살리는 지역 문화예술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현장과 현장, 현장과 이론이 만나는 다양한 행사를 마련해왔다. 해마다 풍성하게 열리는 ‘포럼’, ‘전문가 초청 워크숍’, ‘강연’ 등은 지역 문화예술의 현실을 점검하고 전망을 모색하는 생생한 담론장으로, 대개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인 지역의 ‘문화거점’에서 열린다. 즉 TRAFO가 시골을 살리는 지역 문화예술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벌이는 모든 지원 활동은 현장의 지역성과 장소성을 직접 경험하는 ‘공간’에서 비롯된다. 이하에서는 지난 6년간 지역 내 문화거점이라는 씨앗에서 지역 문화예술의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올린 TRAFO의 성과 일부를 톺아본다.

 


시내 유휴공간을 활용한 지역문화의 중심

변화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역들은 대개 문화거점을 마련하는 데서 출발했다. 고성(古城)처럼 유서 깊은 지역 건물을 활용해 공연장, 도서관, 미술관 등 지역민이 수요자로서 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축제 운영 사무국, 문화예술 관련 협회 사무실처럼 지원 활동 주체가 매개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물리적 여건부터 갖췄다. 특히 눈여겨볼 곳은 지역민이 수요자이자 공급자로 문화예술을 누리는 ‘사회문화센터(Soziokulturelle Zentren)’다. 2015년 변화 프로젝트에 승선한 야콥슨-하우스 제센(Jacobson-Haus Seesen)처럼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시내 유휴공간을 활용한 사회문화센터는 센터 이용자인 지역민 스스로 우리 지역다운 문화예술 기반을 만드는 데 참여하도록, 지역민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센터를 운영하는 주체가 되도록 이끄는 만남의 장이다. 

현재 독일 전역에 퍼져 있는 사회문화센터는 애초 대도시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전체 530곳 가운데 절반가량이 교외 또는 농산어촌 지역에 있다. 대도시에서 사회문화센터의 역할과 소도시 및 교외·농산어촌 지역에서 사회문화센터의 역할은 사뭇 다르다. 문화자원이 풍부한 대도시에서 사회문화센터는 그 공급망을 이루는 하나의 그물코라면, 시골에서 사회문화센터는 문화자원이 흘러들고 흘러나오는 단 하나의 공급처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골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터전 또는 가장 유리한 입지가 사회문화센터고, 이곳이 지역문화의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올리는 최적의 토양이라면, 사회문화센터는 지역민이 주도하는 문화자치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사회문화센터 야콥슨-하우스 제센은 지어진 지 2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오래된 벽돌 건물에 자리 잡았다. 1801년 교육자 이스라엘 야콥슨(Israel Jacobson)이 ‘평등한 공존 사회를 이끄는 교육과 문화’의 터전을 일구고자 세운 건물은 줄곧 학교와 기숙사로 쓰였으나 지난 100년간 비어 있는 때가 더 많았다. 1975년 원도심 심장부에 있는 이 건물의 쓸모를 알아본 시는 그 소유권을 취득했다. 커뮤니티 센터로 탈바꿈한 건물에 시립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시정 홍보 및 문화행사 안내는 물론 청소년 법률지원 등 공공 서비스가 제공됐다. 

2015년 TRAFO 변화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게 된 커뮤니티 센터는 '모두를 위한 센터(ein Zentrum für ALLE)‘라는 구호를 내걸고 더 많은 지역민이 모여 함께 문화를 즐기고 만들어가는 지역문화의 심장부로 거듭나는 시도에 나섰다. 문화예술 관련 기관에서 일하는 활동가 그룹과 지역민으로 이루어진 이용자 그룹이 함께, 새로운 공간의 역할을 정의하고 프로젝트 진행 지침을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꾸준히 워크숍을 열어 기획을 고치고 보강하는 과정을 거치며 커뮤니티 센터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의 발전을 꾀한 결과 다양한 지역민이 한데 모였다. 예술협회, 시민단체가 둥지를 틀고 시니어클럽, 청소년공방(Jugendfreizeitstätte)이 들어서는 등 직종과 나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교류하고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콘서트, 영화 상영, 연극 상연 등 다양한 공연과 체험활동·교육 프로그램이 열리는 것은 물론이다.

야콥슨-하우스 제센 전경. ⓒStadthaus Seesen

야콥슨-하우스 제센 내부 모습. ⓒTim Schenkl, TRAFO

야콥슨-하우스 제센에 자리 잡은 청소년공방에서 진행한 그라피티(graffiti) 워크숍 결과물을 전시한 모습. ⓒ야콥슨-하우스 제센 페이스북 계정

오래된 빈 건물을 사들여 지역민에게 개방하고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변화의 물꼬를 튼 주체는 제센시 당국이지만, 이제 이 공간을 가꿔나가는 주체는 지역민이다. 야콥슨-하우스 제센의 운영 주체는 관이 아니라 민, 즉 이용자가 만든 비영리단체다. 시 당국은 문화는 공동체의 삶, 즉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이라는 것을 잘 알고, 지역민은 야콥슨-하우스 제센이라는 문화거점이 지역문화는 물론 지역에서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마중물임을 잘 아는 덕분이다. 

이처럼 TRAFO 변화 프로젝트를 계기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던 커뮤니티 센터는 지역민 이용자가 직접 공공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센터로 변신했다. 공공의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둘은 차이가 없지만, 전자는 지역민이 행정 당국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수요자에 머무는 것과 달리 후자는 지역민이 수요자인 동시에 공급자가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역을 살리는 지역민의 몫을 주지하는 TRAFO의 기본 강령이 이런 차이를 매개한 셈이다. 

 


지역의, 지역에 의한, 지역을 위한 미술관

오더브루흐 미술관 알트란프트(Oderbruch Museum Altranft)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독일 동북부 농촌 지역의 어느 작은 마을에 야외미술관(Freilichtmuseum)이 들어섰다. 이 미술관은 줄곧 폐관 위기에 몰렸으나 미술관을 찾는 소수의 관객 덕분에 명맥을 유지했고, 2016년 TRAFO 변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재생의 길에 올랐다. 같은 해 프로젝트를 이끄는 미술관 기획팀은 기존 소장품을 대대적으로 ‘개편(Revision)’하는 작업에 착수하며, ‘알트란프트 야외미술관’을 ‘오더브루흐 미술관 알트란프트’로 개조하는 변화 프로젝트의 첫 삽을 떴다. 외부 전문가와 미술관 직원으로 구성된 자문단이 예술작품을 용도와 상태별로-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 실용적인(미술관 프로그램에서 쓰이는) 것,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것- 분류했고, 가재도구와 가구, 수공예품, 농기구 등 지역 생활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유물 또한 전문가의 분류 작업을 거쳐 재정비됐다. 소장품은 미술관의 관심과 지향을 나타내는 척도다. 따라서 소장품 관리를 새로운 미술관의 주요 과제로 삼은 미술관 기획팀은 2017년 소장품 담당 학예사를 기용했고, 해마다 소장품 수집 및 관리 현황을 미술관 소식지에 싣고 있다.

지역민도 소장품 개편 작업에 참여했다. 야외미술관 시절 전시된 적 없이 미술관 다락에 방치돼 있던, 무려 3.000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을 모두 전시장으로 옮기는 일에 지역민도 힘을 보탠 것이다. 먼지 쌓인 소장품을 밖으로 끌어낸 지역민, 전시장에 가지런히 배치된 소장품을 마주한 지역민들은 그동안 가까이 있지만 별 관심 없던 미술관의 과거와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지역민이 미술관의 변화를 선포하는 자리에 함께하는 경험은 ‘새로운 지역미술관’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을 불 지피는 계기가 됐다.

미술관 변화 프로젝트의 신호탄이 된 '소장품개편(Revisionsammlung)' 전시장 모습. ⓒOderbruch Museum Altranft

이렇게 미술관의 자산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지역민과의 소통에 적극적인 미술관의 변화 기조는 다음과 같은 기획과 맞물린다. 오더브루흐 미술관 알트란프트의 또 다른 특장은 ‘올해의 주제(Jahresthemen)’다. 미술관은 해마다 농촌이라는 지역성과 오더브루흐라는 장소성에 뿌리를 둔 올해의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충실한 프로그램을 만든다. ‘오더브루흐의 수공예’(2016), ‘물과 오더브루흐’(2017), ‘농업과 오더브루흐’(2018) ‘오더브루흐의 경작문화’(2019), ‘오더브루흐의 사람들’(2020), ‘농부의 근성’(2021) 등 오더브루흐의 일상과 긴밀한 주제는 미술관의 연간 계획을 결정하는 중심축이다. 1년간 미술관에서 여는 전시, 강연, 공개토론, 영화·연극 관람 행사부터 미술관 발간 출판물과 협업 프로젝트까지 모두 올해의 주제를 따른다. 

한 예로, 2018년 올해의 주제는 ‘농업과 오더브루흐’였는데, 미술관 기획팀은 먼저 지역 내 다양한 부류의 영농인을 취재했다. 유기 농가와 관행 농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농가와 새내기 농가, 소규모 자영 농가와 대규모 기업형 농가 등 서로 다를뿐더러 반대되는 성격의 농부들을 두루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전시를 비롯해 미술관이 기획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 모든 활동을 책으로 펴냈다. 3회에 걸쳐 열린 전시는 오랫동안 오더브루흐에서 땅을 일궈온 농부의 노동을 돌아보는 한편 농부가 즐겁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유와 여지를 고민하고, 농사로 거둔 농산물은 물론 농업이 지역에서의 삶에 불어넣는 활력을 조명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과 농부의 삶을 위해 뒷받침되어야 할 정책을 제안하는 등 다양한 내용을 담아냈다. 교육 프로그램이나 체험활동에 주민이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프로그램을 한데 묶는 주제를 발굴하고 살아있는 지역 문화유산을 쌓아 나가는 데 지역민의 참여를 전제한다는 것은 지역 소재 미술관이 ‘지역을 살리는 지역미술관’이 되기 위해 염두에 둬야 할 지침이다.

‘오더브루흐의 수공예’ 전시장 모습. ⓒOderbruch Museum Altranft

‘물과 오더브루흐’ 전시장 모습. ⓒOderbruch Museum Altranft

‘오더브루흐의 경작문화’ 전시장 모습. ⓒOderbruch Museum Altranft

이뿐만 아니라 오더브루흐문화유산네트워크 회원들과 협업하고, 농촌교육네트워크를 통해 지역 소재 학교·유치원의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돕는 등 미술관이 오더브루흐의 문화 현장을 보존하고 가꿔나가는 데 이바지한 성과는 작지 않다. 지난 5년간 미술관이 이끈 변화 프로젝트는 오더브루흐에 속한 17개 마을이 지역 문화유산 현장 36곳을 보존하자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오더브루흐문화유산네트워크의 운영 자금을 후원하는 변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올해로 TRAFO의 지원은 끝나지만, 오더브루흐 미술관의 성과를 좌시하지 않은 메르키슈-오데를란트군은 매년 미술관에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 지난 10월 브란덴부르크주가 선정한 8곳의 ‘지역 문화거점(regionalle kulturelle Ankerpunkte)’에 포함돼 앞으로 3년간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됐다. 5년 전만 해도 내일이 보이지 않던 미술관은 그사이 미술관의 앞날은 물론 지역문화 현장의 앞날까지 내다보는 역량을 기른 셈이다.

 

올해 오더브루흐 미술관 알트란프트는 ‘농부의 근성(Eigensinn)’을 올해의 주제로 삼았다. 고집스럽고 우직한 농부의 근성을 독선에 빠져 변화를 거부하는 관성이 아니라 인내할 줄 알고 소신을 따르는 정신으로 풀어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치 말아야 할 것마저 변해버리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변화는 무엇일까. 새로고침한 미술관이 지키려는 것. 그것은 우리 지역의 지역색을 만들어가는 마음이다. TRAFO 변화 프로젝트에 승선한 지역들은 변하되 변하지 않았다. 우리 지역을 가장 잘 알고, 여기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문화를 가꿔나가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 지역민만이 아니다. 사라질지 모르는 지역이 지속 가능하길 바라며 지역문화를 경작하는 데 힘을 보태는 정부, 활동가, 연구자, 예술가, 이들 모두의 마음도 변치 않는다. 그 모든 마음이 모이는 곳이 바로 지역 문화거점이 아닐까. 지금 우리 지역의 문화거점은 어디인가. 우리 지역의 지속 가능한 내일을 위해 과감히 달라지되 지켜야 할 것을 되묻고 소신을 따르는 마음이 모이는 곳. 변하되 변치 않는 곳. 그곳이 절실하다.

2021. 11.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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