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성’이라는 덫으로부터
— 소설 『훌훌』 리뷰

강수환

문학평론가

‘정상성’이라는 덫으로부터

소설 『훌훌』 리뷰

강수환

문학평론가


1

문경민의 『훌훌』(문학동네, 2022)은 집을 떠나 모든 과거를 ‘훌훌’ 털어내고 싶은 고등학생 ‘유리’의 이야기이다. 여기까지만 들었을 때 유리의 시도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문학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배반하려는 시도 같은 것이며, 이것은 거의 공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가 애써 유리의 이야기를 좇는 이유는, 그 실패 속에서 마주하게 될 어떤 뜻밖의 진실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집’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집만 한 곳 없네(There’s no place like home).” 이것은 『오즈의 마법사』의 끝에서 도로시가 외운 주문으로, 적지 않은 수의 성장담 줄거리를 축약한 문장이기도 하다. 미숙했던 주인공들은 집으로 대표되는 일상의 터전과 울타리를 넘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 하지만, 실제로 부딪혀본 세상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고,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집만 한 곳 없네’라는 깨달음을 얻고 그렇게 이야기는 종료된다. 다소 시시하게 들리는 결말이다. 그 고생 끝에 얻은 교훈이 겨우 ‘집만 한 곳 없네’라니? 하지만 우리는, 앎이란 늘 뒤늦게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컨대 책으로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공부했더라도 여러 차례 넘어지고 휘청거리는 경험을 직접 몸으로 반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전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은 집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한참 헤맨 이후에야 몸소 자신의 토대이자 뿌리이기도 한 집의 소중함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이 순간을 우리는 ‘성장’이라 부른다.


『훌훌』에서 유리의 성장도 어느 정도는 ‘집만 한 곳 없네’라는 사실을 깨닫는 여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만 한 것 없네’일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입양과 버려짐을 겪어야 했던 유리에게 최초 가족은 “싹둑 끊어 내고” 싶은 “징글징글한 과거”(32쪽)에 불과했지만, 소설의 끝에서 유리는 오히려 과거에 더 단단히 뿌리내림으로써, 가족과 새롭게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성장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제목과 달리 유리는 집과 가족 그 무엇으로부터도 훌훌 떠나본 적이 없다. 과연 유리는 어떻게 집을 떠나지 않고서도 집만 한 곳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문학동네

2

발단은 어머니 ‘서정희’의 죽음이었다. 갑작스레 어머니의 비보를 전해 들은 유리의 마음에는 묘하게도 슬픔보다는 “어정쩡한 감정”(13쪽)이 찾아든다. 그도 그럴 것이 서정희는 유리에게 그 존재 자체가 ‘어정쩡한’ 양가적 인물이었다. 유리는 건조한 문장으로 서정희와 자기 사이의 관계를 묘사한다. “나를 입양했던 사람이었다. 나를 버린 사람이었다. 함께 살았던 시간은 3년이 전부였다.”(같은 곳) 여덟 살 이후 유리는 줄곧 할아버지와만 살았다. 이렇듯 서정희는 지금의 유리를 있게 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유리를 떠나 그의 유년에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사라진 자였다. 공백과도 같은 자신의 지난 시간을 이해해보고 싶어도 유리에게는 더 이상 이를 물을 수 있는 어머니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껏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유리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는 “입양 사실에 관해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되면 목구멍이 좁아지면서 말이 나오지 않았”(19~20쪽)고, 그때마다 “알 수 없는 수치심”(20쪽)이 일었다고 말했다. 가족에 관한 질문에 유리가 표면적으로 어떤 대답을 했든, 유리의 내면에서 치솟은 수치심이야말로 그의 가장 진실한 응답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수치스러웠을까? 누군가는 겨우 가족의 형태를 묻는 일에 과민 반응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유리의 진심을 그가 표면적으로 내뱉은 문장이 아닌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질문의 핵심도 결국 말해지지 않은 배면(背面)에 자리한다.


이를테면 ‘정상성(normality)’ 같은 것이 있다. 사회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어떤 가상적인 표준의 상과 규범 등을 이르는 말일 텐데, 이는 우리가 무심코 건네는 질문 아래에도 교묘한 형태로 숨어 있다. 가령, 우리가 가족에 관해 물을 때, 많은 경우 여기서 가족이란 이른바 ‘정상 가족’이라 불리는, 더 자세히는 친족 형태의 부모와 자녀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 모델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정상 가족’ 모델의 형태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사람일수록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가족에 관해 묻는다는 것은 단지 가족의 형태나 구성원을 궁금해하는 것 이상의 추궁이기도 하다.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이 바꿔 쓸 수 있겠다: 당신은 ‘정상’에 속합니까?


이는 유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가족이라는 자신의 존재적 바탕을 타인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형태로 바꿔 대답해야 했다. 구성상 정상 가족 모델이 아니라면 — “너는 내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19쪽)라는 서정희의 표현처럼 — 혈연을 초월하는 사랑이나 숭고함이 그 부재하는 정상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쉬이 기대받곤 한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시키기에 앞서 유리는 이를 자신에게조차 답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작 유리는 서정희에게 사랑을 느낀 적이 없었고, 어떻게, 왜 자신이 이 가족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닌 자기 존재에 관해 말할 수 없다는 것, 자신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이를 이해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 유리의 수치심은 바로 이곳에 기인한다.


이것이 유리가 자신의 모든 과거와 훌훌 단절하고 싶었던 이유다.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유리가 자기 존재의 기반에 해당하는 가족을 삶에서 제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보다 더는 자기 존재에 관해 침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테다. 물론 만만치 않은 계획이다. 과거를, 다시 말해서 현재의 나를 떠받치는 지층을 생략한 채 미래로의 도움닫기를 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정상성의 덫은 여간 촘촘한 것이 아니어서 유리는 오히려 또 다른 침묵의 수렁으로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리가 처한 이 딜레마는 앞에서 쓴 것처럼 서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즉 유리 스스로가 잘라내고 싶었던 과거의 커다란 한 축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서부터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로써 서정희의 또 다른 자녀 ‘연우’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정희의 친자인 연우를 돌보면서 유리의 계획은 점차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동안 유리의 시선은 — 과거를 훌훌 털어버린 — 미래에 있었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생 신분으로 학업을 병행하면서 이전까지 대화조차 나눈 적 없던 초등학교 4학년 동생을 갑자기 책임지게 된 유리에게 저 먼 미래를 바라볼 여력 같은 것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연우 한 명 왔을 뿐인데 지진이 난 것 같았다”(82쪽)는 유리의 독백에서 보듯, 연우와의 만남은 유리의 삶 전반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유리의 시선이 집을 떠나 있을 때, 그의 삶은 오히려 평온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이 온통 연우, 할아버지, 친구들, 그리고 죽은 서정희에게 집중되었을 때, 유리의 일상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유리가 집을 떠나지 않고도 ‘집만 한 곳이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많은 고전적 성장담에서 주인공은 세계의 비밀을 찾기 위해 집 바깥으로 나섰지만, 유리의 눈에는 집 바깥의 세상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야말로 예측할 수 있는 편안한 세계처럼 보인다 ─ 정상성의 규준으로 가득한 뻔한 세계. 반면 늘 유리 가까이 있던 집과 가족이 도리어 그에게는 미지의 영역이기에, 유리의 모험은 기존의 모험담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유리는 연우를 돌보던 중 그가 오랜 시간 서정희로부터 정서적·물리적으로 학대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리는 아주 먼 거리에서 방임과 버려짐으로, 연우는 아주 밀접한 거리에서 가해진 폭력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남매는 서로의 거울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대로 인해 몸과 마음 모두 불안정한 상태인 연우를 돌본다는 것은 유리에게 분명 여의찮은 일이었으나, 유리의 상처는 그런 연우와 함께 울고 웃는 과정에서 점차 회복된다. 연우를 돌본다는 것은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거울에 비친, 바꿔 말하자면 동일한 아픔을 공유하는 또 다른 ‘나’의 상처를 보듬는 것이기도 한 까닭에서다. 소설의 끝에서, 유리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공유하는 친구 ‘세윤’으로 인해 자신이 입양되기까지의 전모를 알게 된다. 서정희는 명백한 아동학대자다. 하지만 그가 불행한 사고로 혼자가 된 서로를 가족으로 맞아들이려 결심하기까지의 심정을 헤아리던 유리는, 급기야 “서정희 씨가 고마웠다. 없던 과거일 필요는 없었다”(249쪽)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유리가 지금의 가족을 문득 새롭게 발견하고 더 단단한 인물로 거듭나게 된 배경에는, ‘없던 과거’로 남겨두고 싶었던 자신의 상처를 응시하고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자리한다.


자신이 떨쳐내고자 했던 집, 가족, 과거의 시간이 어떤 형태로 서로에게 기대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의 우리를 형성해왔는지를 몸으로 깨달았을 때, 유리는 한 단계 성장한다. 물론 유리는 세윤이 전해준 방송을 보기 전부터 이를 알았을 것이다.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의 지난 시간 아래 가려진 상처를 확인하면서, 그렇게 함께 채워가야 할 지점을 발견하고 끌어안는 관계 속에서, 유리는 이미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집만 한 곳 없네 ─ 마침내 유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3

이대로 마무리되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이것은 진정 행복한 결말일까? 가족 형태를 둘러싼 어떤 정상성의 압력 앞에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지금의 가족을 새롭게 재발견하기까지 유리가 거쳐온 이 힘겨운 여정은 분명 감동적이다. 다만 이 소설이 세계 내 안정을 호출하는 방식은 미심쩍다. 가족에 눈길을 두지 않았던 유리가 결국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돌봄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을 때,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성 역할을 여성 청소년 주인공이 자임했을 때 비로소 안정이 찾아드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서정희가 이해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 비록 아주 왜곡된 형태이기는 하나 — ‘모성’이 확인되는 순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무의식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결말을, 서정희가 실패한 ‘어머니의 역할’을 청소년인 유리가 대체하는 것으로 독해한다면 과한 처사일까?


하나의 정상성(정상 가족)이 만들어낸 모순을 또 다른 정상성(성 역할)으로 해소하려 할 때, 우리는 여전히 정상성의 덫에 빠져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희망에 찬 얼굴로 “잘됐을 거야. 아주아주 잘됐을 거야”(251쪽)라고 말하는 유리에게 우리는 소설에 없는 당부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이제 정말,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2022. 07.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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