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비
연출가
이은비
연출가
코로나19가 시작되고, 국립극단은 공연 실황을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온라인 극장’ 유료 서비스를 시작했다. 온라인 극장의 다른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스카팽>은 원 공연 영상과 함께 수어 통역, 화면 해설 버전의 배리어프리(barrier free) 공연 영상을 오픈했다. 코로나19 시국에서 극장을 찾기 어려워진 관객들을 위한 배려로 시작된 공연의 영상화는 비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관객들뿐만 아니라 극장까지의 접근이 어려웠던 관객들까지도 공연을 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방식의 ‘장벽 허물기’이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극장의 문턱을 낮추는 배리어프리 공연 만들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온라인 극장의 화면 해설은 공연 실황 영상을 위한 배리어프리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동안의 배리어프리 공연들을 돌아보면, 청각 장애인을 위해서는 수어 통역이나 자막을 사용하는 방식이 주로 쓰이는 반면, 시각 장애인을 위해서는 더 다양한 방식의 배리어프리 방법론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방법론들은 배우들의 의상, 분장, 역할을 설명하는 것부터 조명의 밝기 변화를 설명하는 것, 극 중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동작을 배우가 공연 시작 전 하나의 단어로 개념화한 후, 공연 중 이를 행할 때마다 개념화한 단어를 발화하는 것, 나아가 배우의 동선이나 감정이 표현된 지문의 일부를 배우들이 대사와 함께 발화하는 공연까지 아우른다. 다시 말해 시각 정보는 물론 소리로 들어도 알 수 없는 청각 정보를 각 공연의 특성에 맞도록 공연 안에 녹여낸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국립극단
<스카팽>(원작 몰리에르, 각색·연출 임도완)은 ‘스카팽의 간계’라는 제목 ─ 원제 ‘Les Fourberies de Scapin’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스카팽의 간계’이다 ─ 으로 더욱 익숙한 연극으로, 명동예술극장에서 2019년과 2020년에 공연되었다.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의 작품은 2020년 10월의 공연본이다. 한국 관객들은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ˊarte)’1 형식이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관객들이 <스카팽>의 연극적 형식 ─ 아크로바틱(곡예), 언어 유희, 랩과 노래, 악기 연주, 반복 ─ 을 이해하고 웃음을 터트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자를 힘주어 밀면, 마침 의자가 멈추는 곳에 위치하던 다른 배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에 앉는다거나 비언어적인 표현인 몸짓, 표정 등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성격이 짙은 만큼, 공연의 시각적·청각적 정보들이 화면 해설을 통해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하였다.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의 <스카팽>은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작품 소개’, ‘연출 소개’, ‘등장인물 소개’, ‘악사의 위치’, ‘분장’, ‘무대 설명’, ‘소품 소개’ 등의 정보를 화면에 활자로 띄우고, 이를 음성 해설을 통해 들려주며 시작된다. 이어 아직 막이 오르기 전 중앙의 본 무대 위치와 함께 무대 오른쪽, 왼쪽에 각각 나와 있는 ‘몰리에르’와 ‘악사’의 위치를 설명한다. 막이 오르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본 무대 위로 올라서거나 본 무대 밖 몰리에르가 위치를 바꾸는 등 모든 상황을 음성 해설로 전달하여, 눈을 감고 듣는 것만으로도 배우의 대략적인 위치를 상상할 수 있었다.
<스카팽>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배우들의 액팅과 대사의 리듬감, 그리고 악사의 호흡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순간의 웃음과 쾌감이다. 온라인 극장의 화면 해설 버전 역시 화면 해설이 공연의 한 부분으로서, ‘코메디 호흡’ 안에 잘 녹아들어 있어 온라인 공연 관람의 새로운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슬랩스틱(신체적 개그) 액션과, 여기저기로 튀는 스토리와 액팅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코메디의 시청각 정보를 해설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설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명료하고, 선별된 해설이 무대 위의 코메디 호흡을 관객이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돕고 있기 때문에, 화면 해설까지도 코메디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즐겁게 관람하였다.
화면 해설은 주로 배우들의 대사가 없는 음성적 공백이 생긴 순간에 추가되었다. 게다가 역할의 이름과 행위, 움직임은 물론 가끔은 표정의 의도도 해설하여 마치 오디오 북처럼, 공연을 상상하며 볼 수 있도록 도왔다. 다양한 움직임이 어우러진 연극의 특성상 모든 움직임이 화면 해설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배우의 동작이 다른 인물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 모두 해설되었고, 이를 따라가다 보니 오히려 공연의 드라마적 구조와 인물 관계의 변화를 도드라지게 확인하는 재미마저 느낄 수 있었다.
ⓒ국립극단
<스카팽>은 이 작품의 작가이자 화자인 몰리에르 역의 배우가 무대 앞으로 나와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주로 사용하는 아를르깽(arlequin, 광대) 가면을 쓰고 몰리에르의 생애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짧은 1인극으로 시작된다. 배우는 다양한 움직임을 선보이고, 대사의 어조와 템포감을 다채롭게 변주하고, 갑자기 익살스러운 행동을 하는 등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형식을 관객들과 공유한다. 몰리에르의 장면이 끝나면 막이 열리고 중앙의 본무대에서 ‘옥따브’(귀족)와 ‘실베스트르’(옥따브의 하인)의 장면이 이어진다. 이 짧은 장면은 한 배우가 밀어놓은 의자에 상대 배우가 천연덕스럽게 앉는 등 재미난 설정을 보여주는데, 배우들의 호흡과 움직임의 합이 맞는 것 역시 이 연극의 형식을 구성하는 일부임을 관객들에게 일깨운다. 이 두 장면의 화면 해설도 연극의 형식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목적에 함께한다. 몰리에르 역의 배우가 익살스러운 행동을 하는 경우, 대사와 행동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행동이 표현하는 바를 설명한 뒤 이어지는 다른 행동을 설명했다. 한편 옥따브와 실베스트르가 등장한 장면에서는 움직임이 실행되는 순간에 적확한 해설을 넣어 이후에 발화된 대사와의 연관성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함께 녹음된 때마다 웃음을 유발한 행동에 대한 화면 해설을 곁들여서 어떤 관객도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공연 영상 도입부에서 해설하지 않은 분장, 인물들 간의 관계, 캐릭터(인물)의 성격과 연관된 행동 등은 해당 인물들이 등장하는 순간에 해설되어 인물이 어떤 외양을 가졌고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상상을 도왔다. 따라서 관객들은 이후 그 인물이 다시 등장했을 때 배우의 연기가 음성으로 전해지는 것만 들어도 인물의 행동이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옥따브의 어머니 ‘아르강뜨’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그가 무대에 올라서고 내려가는 순간 묵직한 저음의 북소리와 소리지르는 효과음이 들리는데, 머리 모양과 의상에 대한 해설과 합쳐져 캐릭터를 전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국립극단
옥따브와 실베스트르, 그리고 ‘이아상뜨’(옥따브의 연인)가 지략가인 ‘스카팽’(옥따브의 친구 레앙드르의 하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을 보자. 세 명의 배우가 돌아가며 의자를 스카팽 주변에 가져다 두어 다리와 팔 받침으로 사용하게 하거나 스카팽이 의자 위에서 걸을 때 의자를 스카팽 앞으로 두어 길을 까는 장면을 통해 스카팽은 술수를 잘 부리며 사회적 계급의 차이를 막론하고 셋 다 스카팽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면 해설에서는 의자를 가져다놓는 행동과 의자에 신체의 일부를 올리는 스카팽의 행동을 묘사하여 장면이 직관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바를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의자 위에 선 스카팽과 본 무대 바닥에 서서 몸을 낮춘 인물들 사이의 높이 차를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된 권력 관계의 전복 역시 관객들이 이러한 전복을 유추할 수 있도록 세밀한 화면해설로 묘사됐다.
화면 해설은 대개 배우들의 대사가 비어있는 순간에 제공됐다. 그러나, 아르강뜨가 등장하고 하인들이 무대 뒤쪽 커튼 위, ‘2층 공간’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영상 실황에서 재생되고 있는 대사의 음량을 줄이고, 화면 해설이 대사보다 크게 들리게 하는 등 예외도 존재했다. 아르강뜨가 무대에 올라온 것을 먼저 설명하여 무대 위에 등장한 새로운 인물정보를 제공한 뒤, 대사를 들리게 해 인물의 현재 상태를 유추할 수 있도록 했다. 아르강뜨의 두 번째 대사에서 대사 앞부분은 첫 번째 대사와 볼륨을 비슷하게 하되 뒷 부분에서는 볼륨을 낮춘 뒤 화면 해설을 진행해, 배우의 연기는 비슷한 결로 이어지고 있되 무대 공간 사용에 변화가 생겼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또 앞서 ‘무대 설명’에서 소개한 ‘2층 공간’에서 하인들이 아르강뜨를 지켜보고 있는 상황을 들려줌으로써 장면의 복합성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스카팽>은 한국 관객들이 자칫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형식적 재미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동시에, 재치있는 내용과 언어유희가 유발하는 웃음부터 잊어버릴만 할 때쯤 양념처럼 곁들여진 동시대 사회 모습에 대한 환기까지 연극 관람 행위의 재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양반들을 조롱하던 하인과 광대들이 나왔던 마당놀이처럼, 귀족들을 주무르는 재치와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하인 스카팽의 지략이 통쾌함을 선사하는 이야기로, 모두가 힘든 시절, 극장에서 한바탕 웃게 해주는 즐거운 연극이었다. 익살스러운 행동, 아크로바틱, 슬랩스틱 등 온갖 볼거리와 재미 넘치는 순간들로 가득한 <스카팽>을 만든 모든 스태프, 특히 화면 해설로 더 많은 관객이 관람할 수 있게 노력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모두에게 <스카팽(배리어프리 - 화면해설>을 추천한다. <스카팽(배리어프리 - 화면해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화면 해설의 적확한 템포와 묘사는 분명 한바탕 웃고 난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물론 연극의 코메디 호흡을 제대로 경험하게 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국립극단
1)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가면 희극을 가리킨다. 가면을 쓴 배우들이 주어진 줄거리를 바탕으로 즉흥적인 기지(機知)를 발휘하여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는 것으로, 유럽의 희극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코메디아 델라르테’ 항목 내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