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
— 우순미·지희숙·홍희영 미스 럼피우스 활동가

인터뷰어

한승은 ✳︎ 「잇다」 편집부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


우순미·지희숙·홍희영

미스 럼피우스 활동가

인터뷰어

한승은 「잇다」 편집부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의 앨리스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라고 당부하신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며, 먼바다를 누빈 할아버지처럼 더 넓은 세상으로 모험을 떠난다. 어느덧 ‘내 자리’를 찾아 정착하고 싶어진 그는 마침내 어느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여생을 보낸다. 할머니가 된 앨리스, 미스 럼피우스는 언젠가 자신이 뿌린 루핀(lupine) 꽃씨가 바람과 새 덕분에 먼 데로 날아가 세상을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물들인 것을 보고, 더 많은 꽃이 더 널리 피어나길 바라며 힘닿는 대로 씨를 뿌린다.


여기 뿌린 씨앗이 저기서도 꽃을 피우듯, 우리 동네에서 그림책을 나누며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시민이 직접 지역 문제를 탐구하고 정리하는 연구 모임 활동 '소소한 동네연구 - 강원'(춘천사회혁신센터 주관)을 계기로 출범한 '미스 럼피우스' 우순미·지희숙·홍희영 활동가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마음의 문이 닫힌 어르신을 돌보는 생활지원사로, 방문한 어르신과 함께 그림책을 보며 그림책이 펼쳐놓는 더 넓은 세계로 어르신을 안내한다. 세 활동가의 업무가 일찍 끝난 어느 금요일 오후, 커먼즈필드 춘천에서 책 밖으로 나온 미스 럼피우스 3인을 만나 그림책이 어르신의 삶에 불어넣은 힘에 대해, 미스 럼피우스 활동의 어려움과 보람에 대해 들어봤다.

미스 럼피우스 우순미, 홍희영, 지희숙 활동가(왼쪽부터 시계방향)

그림책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테이블 위에 그림책 여섯 권이 나란히 놓였다. 어르신이 묻어 둔 기억을 꺼내고 새 기억을 보탤 수 있도록, ‘생애주기’를 고려해 선정된 그림책들은 서로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아 보였다.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잇는 사연을 엮은 책, 게다가 활동가와 어르신의 손길이 오간 책인 만큼 더 많은 사연이 스며 있으리라 생각하니 눈에 힘이 들어갔다. 첫 책은 ‘나, 꽃으로 태어났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내 삶의 시작을 상기하며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 골랐단다. “어르신은 대개 꽃을 좋아하시니, 어르신도 꽃처럼 예쁘고 소중한 존재로 이 세상에 났다”(우순미)는 걸 일깨우는 것이다(『나, 꽃으로 태어났어』). 이어 복을 찾아 나선 총각의 여정을 따라가며(『복 타러 간 총각』) 어르신이 그동안 지은 복은 무엇이고 다시 태어나면 짓고 싶은 복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럼 그간 살아온 날을 잘 마무리하도록 앞으로 살아갈 날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르신 모두 “내가 기다리는 것은 편안하게 죽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지희숙) 『나는 기다립니다』는 죽음을 기다리는 어르신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도록 이끌고자, 『여우나무』는 나를 떠나보내고 남은 이의 기억 속에서 내 모습은 어떨지 그려보며 어르신 스스로 여생의 매듭을 짓고 편안한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돕고자 선정됐다.

한편 어르신의 삶과 맞닿아 있는 소재를 다룬 그림책을 보며 어르신 스스로 지난날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활동가들이 만나는 어르신은 대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터라 농부와 농촌의 모습이 담긴 그림책은 어르신 삶의 굽이 굽이를 풀어내는 데 알맞은 매개가 된다. 책 속 고추밭 그림을 보며 내가 일한 미나리밭을 떠올리고(『고릴라 할머니』), 평생 흙을 만지느라 거칠어진 손 그림을 보며 그에 못지않은 내 손을 들여다본다(『손이 들려준 이야기들』). 그림책이 “나도 힘들게, 애쓰며 살아왔다”(홍희영)고, 고됐던 지난날을 스스로 다독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어르신께는 막걸리가 주제인 그림책을 갖고 가는 식으로 어르신마다 다른 관심사를 반영한 그림책을 읽으며 어르신의 삶을 알아가는 것은 물론, 그림책 감상이 동기가 되어 직접 그림을 그리는 어르신이나 책에서 연상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어르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림책에는 그림과 글만 있지 않다. 그림책을 함께 보는 어르신은 어르신이라는 한 권의 책을 펼치고 그 책은 그림과 글과 노래와 춤을 모두 담고 있다. “그림책이야말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종합문화예술”(우순미)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순미 활동가(왼쪽)

그림책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다

“책을 펼치는 것조차 낯설어하시고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어려워하시던”(홍희영) 어르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자서전을 쓰게 되기까지, 변화는 씨앗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올라가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신비하게 일어났다. 미스 럼피우스가 뿌린 그림책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까지의 과정은 ‘문화의 힘’이란 무엇인지 새삼 되묻게 한다. 씨앗이 발아하는 힘처럼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힘은 그림책으로 연을 맺은 어르신과 미스 럼피우스 활동가 모두에게 세상을 드나드는 또 하나의 문을 내주었다.

“글을 읽는 것도 그림을 보는 것도 내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던”(우순미) 어르신이 그림책에서 나를 만나고 숨은 재능을 깨닫는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며, 일주일에 한 번 어르신을 찾는 생활지원사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어깨의 무게는 버거운 부담이라기보다 기꺼운 책임이다. 생활지원사의 돌봄이 문화예술을 수반할 때 일어나는 기적은 그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일은 어르신의 오늘만이 아니라 어제와 내일을 묻는 일이 됐고, 어르신께 생기와 활력을 되찾아주는 한편 함께 울고 웃는 일이 되었다. 어르신을 찾는 손에 그림책을 든 것만으로도, 어르신의 삶에도 생활지원사의 삶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어르신은 나의 역사와 예술적 역량을 발견하며 사는 맛과 멋을 느끼고, 활동가는 어르신의 역사와 예술적 역량을 발견하며 책임과 보람을 느낀다. 어르신의 춤추는 선이 고와 감탄하며, 기다렸다는 듯 내보이는 그림 수준에 놀라며 “어르신도 몰랐던 자신의 재능을 함께 발견하는 기쁨”(지희숙)은 미스 럼피우스로서 더 열심히 하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어르신과 그림책을 읽으며 어르신의 삶을 나누는 것도, 그림책이 연상시키는 것들을 그리거나 노래하는 연계 활동을 하며 어르신의 재능을 북돋우는 것도 모두 방문 시간 40여 분을 더 알차게 보낼 방법을 강구하게 하는 동력이다.

지희숙 활동가

미스 럼피우스는 “내가 기다리는 건 편안하게 죽는 것 말고 다른 게 있겠느냐고 이야기하실 때, 나이가 들면 죽는 건 당연하지만 죽음을 기다린다는 게 너무 슬퍼”(지희숙)서 어르신을 방문할 때 그림책을 들고 갔다. 이들은 “일단 어르신이 그림책과 가까워지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어르신이) 그림책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말씀하시도록 이끌어내는”(홍희영) 데 서두르지 않았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까지 기다려야 하듯 어르신에게 심긴 그림책 씨앗이 어르신의 이야기 싹을 틔워 어르신의 그림 꽃, 글 꽃을 피우는 시간은 미스 럼피우스에게도 어르신께도 죽음이 아니라 삶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테다.

 


아직 열매는 맺지 않았다

어떤 그림책을 읽을지 고르는 일은 그림책 큐레이터이자 셀프감정코치이기도 한 우순미 활동가의 안목에 힘입는다. '살아온 삶’, ‘살아갈 삶’, ‘기억될 자신’ 등으로 단계를 나누고 각 단계에 맞는 그림책을 매개로 어르신의 문화접근성을 개선하려는 미스 럼피우스의 노력은 이미 전문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순미 활동가의 반응은 달랐다. "생활지원사로서 할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르신이 문화예술을 누리는 데 더욱 도움이 되려면 우리 같은 활동가만이 아니라, 전문 예술가들이 어르신께 다가가야 한다. 전문 예술가들이 어르신이 많은 경로당이나 병원에서 공연도 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시는 어르신을 '가가호호' 찾아가는 등 관심을 갖고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어르신의 소박하고 참신한 상상력이 깃든 그림과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눌러 쓴 자서전 등 어르신의 작품을 전시하고픈, 나아가 어르신 작품을 보여주고 모아두는 전용 공간을 마련하고픈 꿈을 이야기할 때, 목소리에 들어간 힘은 여전히 묵직하면서도 한결 부드러웠다. “이를테면 ‘생전 장례식’처럼 전시회를 열면 좋겠다. 직접 만든 것들을 집안에 붙여 놓으신 분들이 많은데, 이렇게 각자 갖고 계신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회를 열고 싶다.”(우순미) “좋은 작품이 너무 많다. 경로당이나 복지관에서도 전시회를 열지만, 거기 가서 활동할 수 있는 어르신과 우리가 만나는 어르신은 다르다. 마침 우리 동네에 빈집이 많은데, 이용할 수 있는 빈집을 행정복지센터에서 잘 정비하면 어떨까. 어르신들이 지팡이 짚고, 유모차 끌고 와서 자기 작품을 걸어놓고 볼 수 있는 그런 열린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지희숙) 물론 작품을 전시하고 감상하러 공간에 올 수 있는 어르신보다 외출이 버거운 것은 물론 아직 그림책을 펼치는 것도 생경한 어르신이 더 많다. “우리가 만나는 어르신들은 복지관이나 경로당에서 제공하는 노인 복지 혜택에서 소외된 분들이다. 제가 만나는 어르신들은 대개 경로당에도 안 가신다. 신체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제약이 있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분들인지라 공간이 생겨도 안 가실 것 같다. 그래서 저는 어르신이 집안에서만이라도, 저희를 만나 그림책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그걸 나만의 벽에 붙여 놓는 것에 의미를 둔다. 우리가 (생활지원사로서) 하는 일이 단지 어르신의 안전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르신이 조금씩 문화에 발을 들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홍희영) 어르신 집 안 벽에서 집 밖 전시 공간까지, 생활지원사뿐만 아니라 전문 예술가가 나서는 활동까지, 어르신의 문화 접근성을 위한 미스 럼피우스의 고민은 간단치 않다. 어르신이 문화예술을 누릴 권리, 일명 '문화권'을 보장하는 것은 어르신 모두 '같은' 어르신으로 묶일 수 없는 다양한 조건을 유념하고, 다름을 감안해 보다 섬세한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홍희영 활동가

“우리가 늙어 훗날 받고 싶은 서비스”(우순미)여서 그림책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다는 말은 “어르신께 경제적∙물질적 지원 못지않게 정서적∙문화적 지원이 필요하다”(우순미)는 말과 맞물렸다.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며 남은 생을 연명하는 것이 아니어야, TV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여가의 전부인 삶이 아니어야 한다는 절실함은 어르신에게서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내 모습을 발견하는 공감과 맞물린다. 그림책 속 미스 럼피우스가 뿌린 루핀 꽃씨는 생각지도 못한 데로 날아가 너른 꽃밭을 이루었고, 그림책을 든 미스 럼피우스가 뿌린 문화예술의 씨앗은 어르신의 몸과 마음을 움직였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꽃씨를 뿌리려 한 걸음 더 걷고 그림책을 나누려 한 번 더 어르신을 만나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는 마음은 공감에서 출발한다. 공감은 섬세한 관심을 부른다, 미스 럼피우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공감’하고 ‘섬세한 관심’을 갖는 시도의 무게가 새삼 절실하게 느껴졌다.

202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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