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습지 산책

김하은

벤치앤프레스 대표

강릉 습지 산책

김하은

벤치앤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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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산책하는 그 시간에는 산책하는 사람, 산책자(者)가 되지만, 산책에 능통한 사람, 산책가(家)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동네 한 바퀴 걷는 것을 제 1의 여가로 여겼던 나는 이른바 ‘덕업일치’를 이루고 산책자에서 산책가로의 진화를 꿈꾸며 산책을 나의 업(業) 삼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벤치앤프레스(bench and press)’는 산책을 주제로 책과 인쇄물을 다루는 디자인 스튜디오 겸 출판사다. 산책자에서 자칭 산책가가 된 후로 내겐 모종의 부담감이 생겼다. 좀 더 자주 좀 더 바지런히 걷기 시작했음은 물론, 집 동네를 벗어나거나 한 번도 발 들여보지 않은 길을 택해보는 등 좀 더 모험적인 태도로 산책에 임하게 되었다. 


정처를 정해두지 않고 무작정 걷는 이들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길을 나서기 전에 그날의 산책 경로를 대략 떠올린다(물론 계획한 대로 걷지 못하는 날도 많다). 집에서 시작해 집에서 끝나는 ‘한바퀴 산책’일지라도 중간에 거점으로 삼을 만한 곳 정도는 미리 마음속에 정해두는 것이다. 벤치앤프레스에서 ‘산책 길라잡이: 만보’ (가장 적합한 오늘 하루의 산책을 제안하는 큐레이션 서비스로, 강릉을 걸을 수 있는 여러 경로를 소개한다)를 시작한 후로는 경로 설정의 방법론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산책자로서의 주관과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통제/예측 가능한 산책의 조건을 연결하고 배합하여 강릉 산책의 경우의 수 중 몇 가지를 고정하는 작업에는 반드시 타당한 기준이 필요했다. 


여러 방법 중에서 벤치앤프레스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출발점과 도착점’이다. 터미널과 역, 신도심의 중심 상권과 구도심의 중앙시장 등 강릉 시내의 여러 권역을 망라하는 몇 개의 거점을 선정한 후, 여러 기점으로부터 하나의 종점으로 모아지는 경로, 하나의 기점으로부터 여러 종점을 향해 갈라지는 경로를 정리한다. 그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류는 시내권의 여러 출발점으로부터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길. 남북으로 기다랗게 펼쳐진 강릉 땅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모든 길의 한끝은 반드시 바다에 닿는다. 정동향으로만 걷다 보면 결국 땅끝에서 태평양과 마주 서게 된다는 것이 강릉을 걷는 모든 이들이 ― 인식하고 있든, 없든 간에 ― 공유하고 있는 낭만일 것이다. 이 도시의 산책자들은 파도로 길의 매듭을 짓는다. 


바다로 가는 여러 길 중 교동택지의 신시가지 끝자락에서 시작해 경포해변에서 끝나는 습지 산책길은 예측하지 못한 풍경을 끝없이 마주하는 판타지로 가득하다(오죽헌이나 선교장에서 여정을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신시가지는 자로 잰 듯 깨끗하게 등 뒤로 사라지고, 마치 번화가가 언제 있었냐는 듯 전답이 펼쳐진다. 두렁에 서서 어슬렁,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어르신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 대학가의 복잡스러운 감각은 지워지고 비로소 습지로 나아갈 마음의 채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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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수의 수변부에 자리한 경포생태저류지와 운정공원, 경포가시연습지에 이르는 커다란 습지 구역은 농경지 확대로 개간되는 수난의 시절을 지나 2000년대부터 복원되었고, 지금은 동식물들의 서식공간으로 보호받고 있다. 

습지의 정의1

습지는 영구적 혹은 일시적으로 습윤한 상태를 유지하고 그러한 환경에 적응된 식생이 서식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하지만 습지에 대한 상세한 정의는 나라마다 또는 전문가마다 조금씩 의미가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 습지란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관계없이 담수·기수 또는 염수가 영구적 또는 일시적으로 그 표면을 덮고 있는 지역으로서 내륙습지와 연안습지, 인공습지를 말한다. (습지보전법 제2조 1항)

짧은 여행으로 강릉을 다녀간 사람들에게 강릉에 습지가 있는 것을 아느냐고 물으면 아마 열에 아홉은 모를 거다. 외지 방문객들이 신시가지에 잘 가지도 않거니와 선교장이나 오죽헌 같은 전통문화 유적지에서 바다를 향해 도보로 이동하는 방법은 선뜻 실천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포털의 지도상에선 습지가 어떤 모습인지, 보행로 없는 황무지인지 생태 보호를 위해 접근이 어려운 땅인지도 가늠하기 힘들다. 또 어쩌면 꽤 넓은 땅에 걸쳐 자연습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다와 산, 호수가 있고 강도 있는 자연관광도시 강릉의 화려한 스펙에 가려진,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신체 정보쯤으로 치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이 있는 땅, 습지. 어떻게든 흙으로 덮고 아스팔트를 부으면 그 위로 건물을 지어올릴 수 있겠지만 물에 잠겨 있는 상태 그대로는 사람이 들어가 터를 잡을 수 없어 자연스레 동식물에게 이양된 땅이다. 논밭을 지나 저류지로 들어서면 느리게 흐르는 물 위로 수백 수천 마리의 오리가 몸을 맡기고 있다. 식사하는 부류, 저들끼리 부리를 맞부딪히며 다투는 부류, 열심히 어디론가 헤엄쳐 가는 부류, 뭍에 올라 몸을 부르르 떨며 물기를 터는 부류… 여기 너네 동네구나, 라고 생각하며 이방인을 넘어 이방의 짐승이 된 것만 같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사람은 가장자리의 길을 따라, 자연은 길 안쪽 땅과 물 위로 계절을 따라 흐르며 제 갈 길을 가는 풍경은 매우 평화로우면서도 풍경의 권력이 사람이 아닌 자연에게로 완전히 넘어간 것으로 인해 비현실적인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곳에서 산책자는 그저 걷고 가끔 멈춰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무력한 관람자에 불과하다. 


시끄러운 거리의 글자들을 뒤로 하고, 시야 한가득 초록(草綠)만을 담을 수 있는 강릉의 습지 구역. 간판도, 이렇다 할 표지도, 광고물도 없어 읽을 문자가 지워진 습지를 나는 그래서 무국적의 땅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글자가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도심의 시각적 공해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원시의 계절 풍경을 눈으로 귀로 코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살갗에 닿는 바람의 온도를 감지하는 것보다 좀 더 선명하게 계절을 느끼고 싶을 때 나는 습지로 향한다. 모든 계절이 아름답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습지의 시간은 오뉴월, 봄과 여름의 점이(漸移) 구간이다. 습지 길을 따라 십일 만개했던 벚꽃이 봄비와 함께 떨어지고 나면 뒤늦은 벚나무의 움과 함께 온 습지의 수풀이 기다렸다는 듯 무서운 속도로 생장한다. 저 너머 메타세콰이어로부터 태어났을 것만 같은 갈피 없는 바람에 일제히 흔들리는 습지의 오케스트라, 매일 조금씩 강렬해지는 볕에 감응하여 켜켜이 층을 쌓아가는 녹음. 이 길 위에서 산책자의 속도를 가늠할 척도는 오로지 같은 간격으로 놓인 벤치뿐이다. 그중 가장 목이 좋은 ― 이때의 좋음이란, 오로지 그날 산책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 벤치를 골라잡고 앉아 물 위로 짙게 내려앉는 분홍빛 노을을 관람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계절은 늘 습지에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늦게까지 머문다. 흙과 풀과 물이 한데 엉겨 이루는 커다란 파노라마 속에서 해가 지는 속도에 발맞추어 걷다 보면 쭉 뻗은 습지길을 활주로 삼아 정거 중인 봄을,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뉴월이 지나고 장맛비와 함께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습지로의 발길을 끊지는 마시라. 곧 둠벙마다 가누기 힘든 고개를 세우며 갓난아기 볼기짝 같은 가시연꽃들이 습지를 또 다른 계절의 빛으로 물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1) 국립생태원 웹사이트 ‘습지보전’ 참조.

https://www.nie.re.kr/nie/main/contents.do?menuNo=200246

202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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