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코로나와 미물들


에세이 『미물일기』  작가 리뷰

진고로호 작가

『퇴근 후 고양이랑 한잔』
『미물일기』 저자

나와 코로나와 미물들
– 에세이 『미물일기』 작가 리뷰

진고로호 작가

『퇴근 후 고양이랑 한잔』

『미물일기』 저자


ⓒ진고로호

해마다 5월이 되면 집 근처 호숫가 풀밭에서 개개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마다 호수를 울리는 이 맹렬한 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건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때문이었다. 고립과 고독의 시기를 버텨내기 위해 우리는 모두 각자 숨을 쉴 작은 구멍이 필요했다. 내게는 호숫가를 따라 걷는 산책이 답답한 숨을 몰아쉴 수 있는 해방의 시간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생명에 대한 호기심을 느껴왔다. 보라색 맥문동꽃이 지고 난 자리에 맺히는 진한 초록색의 열매가 가을이 깊어갈수록 검은색으로 익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방금까지 날개를 윙윙거리며 털이 보송보송한 통통한 몸을 이끌고 꽃밭을 날아다녔을 호박벌이 아스팔트 위에 누워있는 모습을 발견한 날에는 ‘미물일기’라는 제목으로 몇 줄의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언제나 급하게 도착해야만 하는 목적지가 있었기에 천천히 걷다 자주 멈추며 살아있는 것들에 온전히 시선을 두는 일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코로나로 인해, 다니던 공동작업실로의 출근도 삶의 활력이었던 수영도 지인들과의 만남도 모두 멈추고, 달리 바쁘게 향해야 할 곳이 없던 그때, 큰 소리로 울어대는 새의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지 않을 핑계가 하나도 없었다. 새는 풀밭 사이를 빠르게 오가며 노래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새의 모습을 관찰하는 동시에 울음소리를 녹음했다. 집에 돌아와 검색을 했고 어렵지 않게 새의 정체를 알아냈다. 작은 개처럼 짖는 새는 바로 ‘개개비’였다.

ⓒ진고로호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의 『태고의 시간들』(은행나무, 2019)에는 ‘창조는 신의 일이고, 이름을 붙이는 건 인간의 일’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신의 존재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이 아름답고 시끄러운 자연의 창조물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고 인간이 지은 새의 이름을 알게 되는 기쁨을 누렸다. 오래도록 새로운 글이 더해지지 않았던 나의 미물일기에 다시 문장들이 쌓였다. 전과 다르게 매일 부지런하게 여백을 채웠다. 집 앞에서 무리를 지어 우는 새의 이름이 ‘오목눈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등나무의 꽃향기를 맡고, 어린 쇠백로들이 호수의 얕은 곳에서 서투른 사냥 기술을 시험하는 광경을 구경하고, 9월 말에도 미련이 남은 것처럼 크게 우는 여름 매미의 노랫소리를 듣던 일을 적었을 뿐인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어딘가에 꽁꽁 숨어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눈에 띄지 않았던 생명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매번 걷던 길이, 항상 보던 존재들이 다르게 보였다. 천천히 걷다가 자주 멈춰 바라보며 기록을 하는 일이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비밀의 문을 여는 암호라도 된 것 같았다.


사회적으로도 또한 개인적으로도 쉽지 않은 시기였다. 감염병의 시대라는 우울하고도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고, 무명 작가 지망생의 마음도 쪼그라들었다. 코로나는 언제 끝이 날지 기약이 없고, 혹시나 확진자가 되어 격리되면 일어날 일들을 걱정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면서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졌던, 창작으로 먹고사는 길을 찾아보겠다는 삶의 목표가 흔들렸다. 이대로 집에 갇힌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완전한 절망으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지만, 비밀의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걷는 일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른 봄기운에 서둘러 꽃망울을 터트린 영춘화는 갑자기 내린 폭설에 잠시 주춤했지만 결국 노란 꽃을 잔뜩 피워내며 봄을 알렸다. 주위 공사로 한동안 물이 빠져 잉어의 등이 보일 정도로 수위가 낮아졌던 호수에도 다시 물이 올라오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고기들이 힘차게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풍뎅이는 사람에게 밟히고, 애벌레는 새에게 먹히고, 잠자리의 알은 부화하지 못하고, 목련이 피워낸 꽃은 만개하기도 전에 썩어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저 계절의 흐름에 따라 주어진 시간을 살았다. 미물이라고 쉽게 치부해왔던 작고 작은 존재들과 나 사이에 살아있다는 동질감이 두터워졌고, 그 생명력의 대단함에 경탄하는 순간이 늘었다.


몰랐던 곤충이나 들꽃의 이름을 알아내는 즐거움에서 시작한 미물일기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지식을 알아간다는 일 너머, 점점 내가 자연의 일부라는 감각을 되찾아가는 여정이 되었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다시 날이 개는 매일을 보내며, 나와 함께 이 땅 위에 살아있는 미물들을 바라보면서, 틈만 나면 걱정과 두려움을 찾아 시선을 돌리는 습관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크고 뚜렷한 성취와 성공을 못 해도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과 생명의 탄생처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정체의 시기를 겪으면서도 우리의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우리의 내일은 또 오늘과 다를 것이라는 희망의 감각을 익혔다. 


그러던 중 미물일기가 카카오 브런치의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을 받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출간 기회가 생겼다. 출간이 결정되고 나서 책의  3분의 2 정도 되는 분량을 새로 써야 했다. 이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되는데 나의 마음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니 부담이 느껴졌다. 그간 미물일기를 채우며 자연의 일부로서의 나를 되찾아가는 한편 내 안의 걱정과 두려움뿐만 아니라 크고 훌륭해 보이는 일들을 성취해야만 한다는 강박도 같이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할 만큼, 나의 글이 왜 수상작이 되었는지 사람들이 납득하고 인정해줬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올라왔다. 글의 소재가 되는 동식물에 관한 전문지식을 다룬 책을 읽고, 생태에 관한 뉴스를 검색하고 인용하며, 나도 모르게 있어 보이고 훌륭해 보이는 글을 쓰려 애를 썼다. 그렇게 쓴 글은 딱딱했고 그 안에서 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전에 스스로를 치유하며 쓴, 소박하고 즐거운 글쓰기로 빚어낸 이야기들이 훨씬 자연스럽고 나다웠다. 다행히도 편집자님의 도움으로 갑작스러운 행운이 불러온 과욕 때문에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때부터 원고를 마무리할 때까지 제일 중요한 사안은 욕심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미물일기’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작은 글들을 써 내려갔다.


초고를 출판사에 보낸 후 무려 2년 1개월 동안이나 시행된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이 해제됐다. 보고 싶은 사람들도 마음 편히 만날 수 있게 됐고, 수영 강습도 재개되었다. 마지막까지 공을 들이던 미물일기의 최종 수정 작업도 모두 끝나, 이제 책이 인쇄되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6월의 어느 날, 가족과 함께 그동안 미뤄온 여행을 떠났다. KTX를 처음 타보는 것도 강릉을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행복하게 두근거렸다. 그렇게 도착한 강릉에서 개개비를 만났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개개비는 귀한 새라 호수의 특정 지점에서만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경포호 둘레의 하천을 따라 나무와 풀이 무성한 산책로에서는 개개비들의 노랫소리가 참새들의 그것처럼 쉽게 들렸다.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우렁찬지 카페 안에서도 선명하고 또렷했다. 가족과 함께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개개비 소리를 듣는데, 주저앉고 싶던 날들 속에서도 절망에서 희망으로, 정체에서 변화로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고생했다고 잘 버텼다고, 우리 모두에게 개개비가 응원을 보내는 것 같았다. 코로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제 코로나와 같이 사는 삶에 익숙해졌다. 그전에는 당연했던 일상의 평범한 일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소중함을 알게 됐다. 위축되고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은 없다. 각자의 작은 숨구멍에 매달려 숨을 몰아쉬면서 우리는 이전과 달라졌다. 내 손에도 작은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여름 철새인 개개비들은 이미 먼 나라로 떠났다. 곧 개개비들이 떠난 호수에 겨울이 찾아올 테지. 차갑고 조용한 계절을 보내며 몸을 움츠리겠지만 겨울은 기어코 끝이 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추위와 정적도 견딜만할 것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까워져 개개비들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천천히 걷고 자주 멈추고 주위를 바라보며 자연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가는 일, 또 다른 미물일기를 한 줄 한 줄 채워나가는 일.

2022. 11.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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