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생태계를 위한 조건들

정지연 대표

에이컴퍼니

코로나19 시대,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생태계를 위한 조건들

정지연 대표
에이컴퍼니


얼마 전까지 우리는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에 살았다. 하루 이틀이면 전 세계 어디든 갈 수 있고, 버튼 하나면 외국에 있는 친구와 영상통화를 할 수 있고, 드론을 띄워 과거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도 있다. 밤에 주문한 물건들을 다음날 아침에 받고,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며, 음성만으로 기기를 조작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 불가능이란 없어보였다. 불과 몇 달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예측해왔다. 데이터를 통해 경기와 주가를 예측하고, 날씨도, 개기일식도, 교통량도 미리 알아내 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코로나19 사태를 예측하진 못했다. 코로나19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것들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집 밖으로 자유롭게 나올 수 없고 다른 사람과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집에 오래 머물게 되자 사람들은 집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바꾸고 꽃이나 식물을 들였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홈트레이닝, 춤 등으로 몸을 움직이고, 불안과 불면을 견뎌내기 위해 요가와 명상을 했다. 음식과 식재료를 집으로 배달시키는 일도 많아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온라인에서 비대면으로 이루어졌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우리 일상에서 유튜브와 배달 앱은 더욱 강력한 채널이 되었다. ‘언택트(Untact)’의 시대가 온 것이다. 


처음에는 한두 달 쉬자고 생각했던 나도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걱정되기 시작했다. 상반기에 예정됐던 사업들이 미뤄지면서, 작년 말 임대기간 종료 후 이사할 전시 공간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그것 또한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공간을 기반으로 했던 많은 문화예술 콘텐츠는 코로나19의 타격으로 휘청거렸다. 소셜미디어 채널에는 예술가들의 걱정과 막막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시나 작품 판매의 기회도 없어졌거니와 아르바이트로 하던 일들마저 중단된 경우가 많았다. 몇 명의 작가는 자신들이 참여할 공공 프로젝트가 없는지 내게 전화를 걸어 묻기도 했다. 위기감이 엄습했다. 


공공에서 코로나19 지원 대책을 세우고, 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여러 긴급 자금이 마련되고는 있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활동 경력을 제출하고, 자신의 소득을 공개하고, 코로나19로 인한 피해를 증명해야하는 등 각종 서류와 절차 때문에 신진작가들에게는 신청 과정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 과정을 전부 거쳤더라도 심사가 이루어지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결국 선발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평소 예술가들과 함께 일하는 에이컴퍼니는 예술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우리도 안개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마침 사회적기업의 사회성과를 측정해 보너스를 주는 SK의 ‘사회성과 인센티브’ 프로그램에 선정돼 2000만 원가량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그 돈을 예술가를 위해 쓰기로 했다. 몇 달 동안 수입이 없거나 줄어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일 것이다. 어쩌면 각종 공과금이나 카드대금을 걱정하고 있을 예술가에게 100만~200만원을 신속하게, 이자도 제출 서류도 없이 빌려주기로 했다. 돈이 없어 소액이라도 빌리려는 것인데 코로나 상황에서 달리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펀드A’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결정을 내리자 속도가 중요해졌다. 멋진 디자인도 생략하고, 글씨만 크게 써서 바로 공지를 올렸다. 구글 폼(Google form)을 사용해 이름과 연락처, 작업분야 등 1~2분이면 작성할 수 있는 간단한 대출 신청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1년 후 상환 날짜를 명시한 간단한 계약서를 만들었다. 대출 신청 접수가 들어오면 바로 전화 확인을 하고, 이메일로 전자계약서를 전송했다. 예술가가 전자계약서에 온라인으로 서명을 한 후 신분증과 통장 사본을 메일로 회신하면 몇 시간 안에 입금이 이루어졌다. 준비했던 2000만 원은 이틀 안에 예술가 15명에게 전부 송금됐다. 


200만원을 신청할 수 있음에도 100만원만 신청한 예술가들이 있어 이유를 물으니 다른 예술가들을 위해 꼭 필요한 금액만 신청했다고 답했다. 그런 예술가들이 꽤 돼서 뭉클했다. 본인은 빌리지 않지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는 응원 메일을 받기도 했다. 시각예술분야 예술가를 대상으로 했음에도 글 쓰는 작가, 연극배우, 국악 연주자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가 지원하는 걸 보고 다른 예술 장르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음을 실감하기도 했다. 


놀라운 건 예술가를 돕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며 몇 십 만원부터 몇 백 만까지 돈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며칠 만에 3000만 원의 추가 자금이 마련됐다. 2차 펀드A 프로젝트에서는 17명의 예술가에게 대출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도 잠깐 사이 신청자가 늘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떨어뜨려야 했다. 다른 심사 기준이 없으므로 에이컴퍼니와 한 번이라도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이들을 우선 선발하는 것이 나름의 장치였다. 


펀드A 프로젝트는 매우 즉흥적으로 시작됐다. 코로나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5000만 원 중 과연 얼마나 회수될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소액을 빌려주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며, 어떤 의미를 가질지도 기대와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에이컴퍼니가 얻은 바는 크다. 사회적기업으로서 예술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확장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누군가를 돕는 일에서 금액의 크기보다 진행 속도가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대출은 정말 돈이 필요한 시점에 신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시기에 대출을 받으면, 작품이 팔리거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수입을 얻었을 때와는 결이 다른 안도감과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이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앞으로 펀드A의 규모와 역할을 더욱 확장시켜 나가려고 한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언택트 시대의 문화예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뾰족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공연장과 박물관을 소독하고 관람객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벌리는 것은 최소한의 방어일 뿐이다. 온라인으로 공연과 전시를 보여주는 것도 지속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TV로도 볼 수 있지만 굳이 축구장을 찾고 야구장을 찾는 것처럼 예술은 현장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자동차 극장을 찾았다. 예전에 한 번 쯤 가본 듯한데,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 전의 일이었다. 신작 영화도 며칠만 기다리면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아니었고, 에이컴퍼니가 매년 개최하는 ‘브리즈 아트페어(Breeze art fair)’를 올해는 자동차 극장에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조사차 간 것이었다.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 아트페어를 상상했지만 여러 조건과 상황의 퍼즐이 쉽게 맞추어지지 않았다. 예정된 축제와 공연과 전시들이 취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트페어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진행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까? 몇 주가 흘렀지만 아직도 결정하기가 어렵다. 

별다른 매출과 활동 없이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버렸다. 공연 역사상 최대 흥행작을 만든 ‘태양의 서커스’도 파산보호 신청을 했고, 세계적인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도 코로나19로 인해 파산 위기에 처했다고 인스타그램에 고백했다. 에이컴퍼니도 회사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할 만큼 앞날이 막막하다. 하지만 다른 상상도 해 본다. 예술은 관람객과 교감하며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어쩌면 더 큰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규모는 더 작고, 퀄리티는 더 높은, 예술가와 관람객이 교감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도 좋을 것 같다. 얼마 전 한 번에 관람객 6명만 입장 가능한 공연에 다녀왔다. 피아노 연주와 함께 여기에 어울리는 영상과 미술작품까지 있는 복합 공연이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풍성했다. 와인을 마시며 예술가와 관람객이 나누는 짧은 토크도 매우 특별했다. 블록버스터 전시나 축제가 아니고서는 어차피 코로나19 이전에도 객석이 비는 일은 많았고, 전시장에 사람이 없는 경우도 흔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기획 단계부터 소수의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콘텐츠로 방향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싶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전시장도 문을 닫기 보다는 예약제로 한 커플, 한 가족만을 위한 잊지 못할 경험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에도 아쉬움은 있었다. 예정된 사업 진행을 중단하거나 취소하지 않고 일단 계획대로 진행했더라면 예술가나 문화예술단체들이 조금 더 안정감 있게 미래를 준비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예측 가능했던 지원금과 사업이 불확실의 영역에 속하게 되면서 예술가와 단체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작품을 준비하는 것도 어렵고 혹시나 하는 희망을 놓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앞으로 문화예술 정책은 ‘시장’을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무리 수준 높은 예술 작품이라도 그것을 구입하는 사람이 없으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었다. 마음껏 숨 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주말에 여행을 가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일상과 관계를 회복해 가는 것,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중요한 일이 될 것 같다. 여기서 문화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아직 나도 알 수 없지만, 함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해 봤으면 한다. 하루아침에 획기적인 답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그 상상의 과정에서 조금씩 일어나는 실험을 통해 실마리를 찾게 되리라 믿는다.

2020. 8.

16호

강원문화재단 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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