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거대한 내부

김남시 교수

이화여대 예술학

우리가 살아가는 거대한 내부

김남시 교수

이화여대 예술학


인류가 생존을 위해 해야 했던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아마도 벽을 찾는 일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동굴 벽은 인간을 추위와 비바람에서 보호해주었을 뿐 아니라 사방이 트인 장소에서 잠을 자다 무방비 상태로 공격받는 위험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동굴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인간은 다시 사냥이나 채집을 나가기 위한 재충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등을 찾는 대신 차츰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스스로 벽을 쌓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을 것이다. 몽골의 유목민들처럼 나무로 틀을 잡고 그 위에 동물 가죽을 얹거나, 에스키모들처럼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잘라 벽돌처럼 쌓아 올리거나, 흙과 돌을 섞어 보다 견고하고 오래가는 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려 집을 짓게 되었을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집을 짓고 그 안에 거주하는 것을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근본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벽을 쌓는 건 또한 그 벽을 사이에 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구별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바로 그 벽을 통해 ‘바깥’의 공간과 구별되는 ‘안’이 된다. 최승자 시인의 “하안발 下岸發 4”이라는 시는 이렇게 벽이 만들어낸 안과 밖을 왕래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안에서 열고
밖에서 잠근다.
혹은 밖에서 열고
안에서 잠근다.

그는 밖으로 나가며 안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가며 밖을 잠근다.


그에겐 안이 온 세상, 

밖이란 온 세상 안에 널린 모래알들 중의 하나, 


그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밖을 잠근다.

그는 더 더 안으로 들어가며 또 또 밖을 잠근다.

유목 생활을 하든 정착 생활을 하든, 인간에게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공간은 필수적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좁거나 넓고, 비싸거나 싼 차이는 있지만 모두 벽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안이 온 세상”이 되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안과 밖이란 그저 벽을 세움으로써 생겨난 상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밖으로 나가며 안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가며 밖을 잠그는” 삶을 살다보니 이 안과 밖의 구분이 절대적인 것처럼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저 벽 하나가 생겼을 뿐인데 우리는 그 벽의 내부에 몰입하고, 그 안을 우리 자신과 동일화해 버리기 일쑤다. 내부는 우리의 확장된 몸이 되고, 내가 사는 세상의 전부가 되며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바깥은 여기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환경위기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가끔 담배꽁초나 쓰레기, 오물을 차창 바깥으로 버리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에게는 차의 내부가 ‘온 세상’이기에 거기만 깨끗해진다면 차 바깥의 사정은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분노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우리는 내가 사는 ‘내부’에 쓰레기나 오물이 쌓이면 그를 집 ‘바깥’으로 내보냄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는다. 일단 외부로 내보내 버리면, 내가 있는 안의 공간, 내 세상의 전부인 내부는 다시 깔끔하고 쾌적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생각하는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의 구분은 정말 유효한 것일까? 집집마다 안에서 바깥으로 내어놓은 쓰레기와 오물은 다시 일정한 장소에 모였다가 소각되거나 매립된다. 그런데 소각되어 대기로 흩어지거나 땅속에 묻힌 쓰레기는 정말 완전히 ‘바깥’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대기나 땅속은 정말 우리의 ‘외부’인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우연히 처하게 된 곳을 ‘안’이자 ‘내부’라고 여기고 거기서 생겨난 모든 골칫거리를 그 ‘바깥’으로 내보내는 방식으로 처리해왔다. 차 안에서 생겨난 배기가스를 차 바깥으로 배출하고, 공장에서 만들어진 폐수를 공장 외부 하천에 방류하고, 도시에서 나온 쓰레기를 도시 외곽의 산이나 공터에 매립하는 식이다. 지질학에서 나온 개념인 인류세(Anthropocene)는 지금까지 인간 문명이 이런 식으로 남겨놓은 흔적이 지구의 지층과 생태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킬 정도에 이르렀다고 말해준다. 우리가 사는 내부를 깨끗하고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해 그 ‘바깥’으로 배출, 처리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상 ‘바깥’이 아닌 지구라는 내부에 계속 쌓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지구의 온도를 상승시키고 생태계를 교란하면서 인간종의 절멸이라는 위기를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벽으로 둘러싸인 내 방과 내 집이지만 그 ‘내부’는 내 집이 있는 거리, 그 거리가 있는 도시와 나라, 나아가 지구 전체의 내부이기도 하다. 내 방과 내 집만을 ‘온 세상’으로 절대화하고 나머지를 나와는 무관한 ‘외부세계’로 돌리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그 ‘외부세계’로부터 우리를 압박하며 역류해 들어오는 것들이 여기가 내부에 다름 아니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깥’에 방출한다고 믿었던 플라스틱 쓰레기는 어류나 해조류를 통해 다시 우리 몸으로 들어오고, 컨테이너에 실어 필리핀으로 방출했던 6000톤의 쓰레기도 결국 평택항으로 재역류해 들어왔다. 후쿠시마 원자로에서 방출될 방사능 냉각수는 그 누구의 ‘외부’도 아닌 우리 모두의 내부를 맴돌며 모두를 병들게 만들 것이다. 코로나19바이러스는 외부가 아닌 우리 내부에서 생겨나 그 내부를 초토화하며 확산 중이며, 그 와중에 기존의 모든 벽을 유명무실하게 만든다. 국경 따위는 우습게 여기며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는 이 바이러스를 궁극적으로 쫓아낼 수 있는 ‘바깥’ 같은 건 없다.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내부에 다름 아니며 그것의 ‘외부’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세먼지가 대기에 가득할 때 내 집(내부)의 공기만 깨끗하게 만들어준다는 공기청정기 같은 게 여기서는 작동할 방법이 없다. 설사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그건 지구 내부의 환경위기를 더 가속할 것이다. 


현재의 팬데믹과 환경위기는 우리 안에 있었으나 우리가 알지 못하던 입 냄새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마스크와 같다. 마스크를 벗는다고 해서 그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출구 없는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가는 법을 다시 찾아내는 수밖에는 없다.


〈"인류세의 새벽(Dawn in Anthropocene)" ⓒCuger Brant〉 

2020. 12.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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