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희
프리랜스 기자
한승희
프리랜스 기자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낯선 구석이 있는 단어 조합이다. ‘강원키즈트리엔날레’. 강원도에서 열리는 어린이(Kids)를 위한 트리엔날레(Triennale)란 뜻인데, ‘키즈’와 ‘트리엔날레’ 사이 ‘아트(Art, 예술)’란 단어가 생략돼 있다. 낯선 구석이 있는 단어 조합이라고 생각한 이유도 바로 이 생략된 ‘아트’에서 기인한다. 전국에서 국립 또는 도립 미술관이 한 곳도 없는 지역인 강원도에서, 오직 어린이를 위한 예술을 주제로, 그것도 의미를 알 듯 말 듯 한 ‘트리엔날레’란 방식의 행사를 연다는 것이다. 트리엔날레는 '3년마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데, 주로 예술 관련 국제 전시회 또는 박람회 제목에 명사처럼 쓰인다. 광주비엔날레(Biennale), 부산비엔날레, 청주공예비엔날레처럼 2년마다 열리는 ‘비엔날레’ 형식은 국내 사례를 제법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트리엔날레’는 그리 익숙한 개념은 아니다.
행사 장소도 낯선 구석이 있었다. ‘강원도’를 생각할 때 사람들이 대부분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홍천군, 그것도 읍내의 홍천미술관을 빼고는 옛 탄약정비공장과 문 닫은 작은 초등학교 분교처럼 ‘아트’와 거리가 먼 공간들이 트리엔날레 개최지로 선정됐다. 홍천읍 결운리에 있는 탄약정비공장은 1973년 지어진 군사시설로, 이름처럼 탄약을 정비하던 곳이다. 탄약정비공장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와동리의 주봉초등학교 분교(이하 ‘와동분교’)는 1954년 개교해 환갑을 조금 넘기고 2015년 문을 닫은 폐교다. 이번 트리엔날레에서 두 옛 공간은 각각 ‘아트탄약’, ‘아트스쿨와동’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소개됐다.
제1회 강원키즈트리엔날레 공식 포스터. ⓒ강원문화재단
코로나19바이러스 확산에 대응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선보이는 다른 문화예술 행사들처럼, 올해 처음 열린 강원키즈트리엔날레도 오프라인 전시와 온라인 프로그램을 병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난 10월 22일 2시부터 3시까지 진행된 개막식은 ‘강원국제예술제’ 공식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됐고, 이 밖에 온라인전시관 웹사이트를 별도로 구축해 전시 관람은 물론 다양한 예술가들이 출연하는 동영상을 소개하는 등 ‘방구석 문화생활’이 가능하게끔 공을 들였다. 오프라인 전시 관람도 장소별로 시간당 30명씩만 입장할 수 있게 했다. 모든 관람객은 마스크를 쓰고 체온 측정 카메라 앞을 지나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가장 많은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은 탄약정비공장, 즉 ‘아트탄약’이었다. 삼각 지붕을 얹은 200평 규모의 건물 내부에선 컨베이어벨트부터 천장에 매달린 각종 고리, 벽의 배전반까지 공장의 역사적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냉기가 느껴지는 이 흔적들 위로 9개국 작가 55명의 생기 넘치는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작품과 함께 작가들이 직접 고안한 ‘아티스트박스’도 전시됐다. 아티스트박스는 어린이들이 자기만의 예술작품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필요한 재료를 담은 키트(Kit)로, 작가별로 다르게 구성됐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신문지, 색종이, 비닐봉지처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담긴 것들도 있고, 아티스트박스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흔치 않은 재료들이 담긴 것들도 있었다. 전시장의 아티스트박스 옆에는 태블릿PC가 비치돼 작가가 직접 아티스트박스 속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들이 재생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뚝딱’ 작품이 완성되는 걸 보면 어린이 관람객 누구나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질 법했다.
탄약정비공장의 역사를 살려 만든 ‘아트탄약’ 전시장 안에서는 작가 50여 명의 작가와 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직접 고안한 ‘아티스트박스’가 전시돼 있었다.
공장 밖 야외 공간에도 큰 규모의 설치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관람객이 직접 걸어볼 수 있는 ‹평화의 순례길›(임옥상 作) 끝에는 평화의 다양한 정의가 새겨진 아크릴 열쇠고리가 열매처럼 맺혀있는 ‹평화의 나무›(임옥상 作)가 서 있었고,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커다란 고양이 ‹쿤캣›(쿤 作)과 액체 방울들로 만들어진 것 같은 기마상(騎馬像) ‹꿈꾸는 돈키호테›(오동훈 作),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잠수함 로봇_위장›(나인성 作) 등 커다란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전동(電動)으로 거대한 잎을 아래위로 흔드는 꽃 옆으로 작은 조화들로 무장한 탱크가 잠들어 있었는데, 트리엔날레 개막 전 ‘표절’ 논란을 일으켰던 ‹그린 커넥션›(최정화 作)이다. ‘그린 커넥션(Green Connection)’은 이번 트리엔날레의 테마이기도 하다. ‘그린(녹색)’은 자연과 평화를 상징하고, ‘커넥션(연결)’은 어린이의 상상력으로 자연과 평화, 세상을 연결하자는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아트탄약’ 야외 공간에 설치된 최정화 작가의 ‹그린 커넥션›.
와동분교는 ‘아트스쿨와동'이란 새 이름답게 어린이 관객들이 직접 창작 활동을 해볼 수 있는 코너들이 주를 이루었다. 산 모양 조형물과 교실 벽면에 관객들이 직접 나무, 동물 모양의 도장을 찍어 공간을 하나의 ‘숲’으로 만들어볼 수 있도록 꾸민 ‘자연룸’(김도훈 作), 관객이 직접 터치스크린 화면으로 도형에 다양한 무늬나 색을 입힌 후 전송하면 그 도형이 하나의 꽃잎이 되어 큰 벽면 가득 아름답게 피어나는 ‘디지털놀이터’(크로스랩 作), 색색의 연필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오픈키즈스튜디오’(파버카스텔 협찬) 등이다. 이 밖에 어린이 시각예술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는 책과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창작활동 키트를 소개하는 ‘아트키즈플랫폼’, ‘아트탄약’에서 만났던 아티스트박스를 살 수 있는 ‘아티스트박스룸’도 있었다. 운동장은 빠키, 한석현, 박대근 등 작가 12명의 작품으로 채워져 ‘예술놀이터’가 됐다. 5년 전 문 닫은 와동분교에 모처럼 아이들 웃음소리가 퍼졌다.
‘아트스쿨와동’의 ‘오픈키즈스튜디오’에서 어린이 관람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트스쿨와동’ 운동장에 전시된 빠키 작가의 ‹중첩된 리듬›.
홍천미술관 1층에서는 창의력과 시각적 표현력이 우수한 ‘미술 영재’들의 작품 21점과 트리엔날레 개막에 앞서 지난 7월부터 약 한 달간만 4세부터 13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진행했던 국제 어린이 미술 공모전 수상작 30점이 전시됐다. 미술 영재 21명은 일회용 나무젓가락의 슬픈 생애를 1인칭 시점으로 그린 스톱모션(stop-motion) 애니메이션부터 점토로 여러 캐릭터를 빚은 조각, 펜으로 선 하나하나의 질감을 살린 세밀화부터 하늘에서 내려다본 미래도시 풍경화까지 다양한 드로잉 작품을 선보였다. ‘자연’, ‘환경’, ‘평화’를 주제로 한 공모전에서도 다양한 기법과 모티프를 표현한 어린이 화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총 343점 작품 가운데 대상을 차지한 건 초등학교 6학년 김정우 학생이 그린 ‹동해 바다›다. 능숙한 붓놀림과 안정적인 구도로 바위와 산,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홍천미술관 1층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미술 영재’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강원키즈트리엔날레는 강원문화재단이 3년 주기로 개최하는 ‘강원국제예술제’의 한 축으로,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강원작가전(展)’(2019)과 홍천군 일대의 유휴공간을 활용한 국내외 작가들의 문화예술 프로젝트로 꾸려질 ‘강원국제트리엔날레’(2021)를 앞뒤에 두고서 올해 첫발을 내디뎠다. 지난 11월 8일로 강원키즈트리엔날레는 막을 내렸으나, 홍천군은 와동분교에 설치된 조각 작품들은 그대로 보존할 계획이다. 또 내년부터는 와동분교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미술체험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할 예정이라 하니, 애물단지 폐교였던 와동분교는 그야말로 ‘아트스쿨’로 거듭나게 됐다. 탄약정비공장 부지도 홍천을 대표할 만한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로이 조성될 전망이다. 강원, 키즈, 트리엔날레라는 세 단어의 낯선 조합이 홍천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연결 고리가 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