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이지 않는 치열함 

— [틈새] ‘잇다’ 16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리뷰

진선

프리랜스 작가

잘 보이지 않는 치열함


[틈새] ‘잇다’ 16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리뷰

진선

프리랜스 작가


겨울이다. 이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한다. 계절이 변했지만 나의 하루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일어나 씻고, 옷에 몸을 끼워 넣고, 지하철을 타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깐 하늘을 봤다가 다시 모니터를 보고, 퇴근길에 동료들과 짧은 수다를 떨고, 지하철에서 내 자리가 생기길 기다리고, 집에 돌아와 불을 켠다.

언젠가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이 작은 행위들이 나를 지치게 한다고 말이다. 이 삶에 특별한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지루하다, 나는 이 지루함을 견딜 수 없다, 이런 생각을 신앙처럼 품어본 적도 있었다. 사실 지금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청소되지 않은 지루함들이 조금씩 쌓이다 어느 날 내 몸 위로 쓰러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 날엔 친구에게 문자로 ‘그렇다면 지루함에 질식되어 죽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무의미한 말을 날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다. 지루한 나날들이 이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설을 나의 생존으로 증명하고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건, 나를 조금씩 좀먹는 지루함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그 무기가 사색이 아닌가 한다. 죽지 않고 계속 살아 보자고 생각한 것, 조금 더 화내고 조금 덜 자책한 것, 친구에게 한 번 더 웃은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겁하게 굴고 만 것, 종일 자다가 늦은 식사를 하고 노을을 바라본 것. 별것 아닌, 때로 나를 들뜨게 하다가도 힘들게 하는 사소한 사색의 순간들을 붙잡고 있으면 지루함 속에서도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뾰족한 가시 같은 것이 만져진다. 그건 삶의 아주 작은 치열함이다. 얼마나 작고, 짧고, 얇은지 마음이 현미경 같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일상의 나는 소음과 피로감에 시달리느라 보통 마음을 현미경으로 만들 기력도 없다. 아마 대부분 사람이 그럴 것이다. 하루는 짧고 사색엔 품이 든다. 그럴 때면 타인이 그려 놓은 이야기를 꺼낸다. 200년 전 누군가가 남긴 일기, 낮잠 자는 고양이 사진, 화성으로 떠난 사람에 대한 소설 같은 것들이다. 내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서 사색을 잠시 빌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누군가가 꼭 살아 있어서, 이 거대한 세상이 지탱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는 예술이, 품이 드는 사색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마중물 같은 게 아닐까 한다. 강원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 웹진 ‘잇다’ 역시 하나의 작은 마중물로서 1년에 두 번, 독자를 만난다. 지난 16호에서는 코로나19 사태에서 문화·예술 현장에 어떤 어려움이 닥쳤는지, 그리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강릉의 역사를 관통하는 맥인 ‘강릉단오제’는 2020년 강한 사회적 거리두기 앞에서 위기를 맞았다. 강릉단오제는 온라인 축제라는 전례를 찾기 힘든 결정을 내렸고, 모두의 우려 속에서 축제를 개최했다. SNS로 신주미를 봉정할 다음 주자를 지목하는 이벤트인 ‘신주미 봉정 릴레이’, 집에서도 단오를 즐길 수 있도록 탈, 부채, 엽서, 스티커, 소원등을 배달받을 수 있는 ‘단오체험 팩 나누기’ 등의 프로그램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강릉단오제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했다.

온라인축제로 전환된 ‘2020 강릉단오제’의 ‘단오굿’ 장면. 단오굿은 온라인으로 생중계됐다.

국립극단의 직원들과 배우들, 스태프들에게도 2020년은 가혹했다. 온라인 중계로 공연을 올리는 등 갖은 노력을 펼쳐야만 했다. 빈 객석에서 카메라를 두고 연기하는 것도 그들에겐 어색하고 낯선 도전이었을 것이다. 국립극단은 ‘무대는 잠시 멈췄지만 여기 연극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온라인 상영회 캠페인을 진행해 연극을 사랑하는 이들의 많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

국립극단의 온라인 상영회 캠페인 ‘무대는 잠시 멈췄어도, 여기 연극이 있습니다’의 첫 상영작 <페스트> 홍보물.

‘잇다’ 16호는 강원도의 문화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한 노력도 전했다.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의 ‘명파DMZ비치하우스’와 ‘명파해변비치하우스’는 오랜 시간 방치되고 있었다. 이 두 건물은 곧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생될 예정이다.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장소가 되고, 예술가들이 머무르는 레지던시 공간이 될 것이라고 한다.


온라인으로라도 축제를 이어 전통을 지켜내겠다는 강릉단오제의 의지, 다양한 플랫폼으로 다가서는 연극계의 투지, 새 모습을 궁리하는 명파리의 생명력이 ‘잇다’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어졌다.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가 ‘잇다’에서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갔다.

‘잇다’가 조명하는 것은 다수의, 서울의, 인간의, 부유층의,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소수의, 지방의, 비인간 동물 종의, 가난한 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누군가가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것이 ‘잇다’의 작은 역할이 아닐까 한다.


‘잇다’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내게로, 또 내 친구에게로, 내 이웃에게로, 그 이웃의 이웃에게로 퍼지는 것을 상상한다. 작은 빗방울이 마른 땅속으로 파고들 듯이, 하나의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듯이 세상으로 스며드는 것을 상상한다. 그렇게 이 세상이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것을 상상한다. 이런 곳에서 나는 치열함을 새삼 느낀다. 켜켜이 쌓이는 것은 지루함이 아니라 치열함이다. 잘 보이지 않는 치열함이다. 잘 보이지 않는 치열함을 느끼고 싶을 때 현미경을 꺼내듯 누군가가 ‘잇다’를 꺼내 보는 모습을 그려 본다.

2020. 12.

17호

강원문화재단 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주소 | 강원도 춘천시 금강로 11 KT빌딩
전화 | 033-240-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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