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이라는 장소
—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 탐방

한승은
「잇다」 편집부

박수근이라는 장소

─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 탐방

한승은

「잇다」 편집부


인제에서 양구로 드는 순간 사방을 에워싼 둥근 산자락에 감탄했다. 낮은 산이 올려보는 하늘은 탁 트였고 내려보는 마을은 고즈넉했다. 국도를 따라 달리는 동안 차창 너머 스쳐 가는 풍경은 단조로웠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푸른 산과 흰 구름이 뜬 파란 하늘과 점점이 눈에 띄는 지붕들. 산에는 ‘국토의 중앙 자연의 중심’이라는 구호가 걸려 있고, 이정표에는 ‘국토정중앙면’이 적혀 있었다. 국토의 중앙이고 자연의 중심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읍내로 들어섰다. 군의 주요 뉴스를 띄운 전광판이 서 있는 교차로에서 좌회전. 눈앞에 동상이 보였다. 아마도 박수근일 거라는 예상은 맞았다. 내비게이션에 따르면, 동상에서 다시 좌회전해 넉넉잡아 5분이면 충분했다. 미술관으로 가는 5분 거리에 5층짜리 아파트 4개 동으로 된 작은 단지가 있었다. 소규모 저층 아파트 단지가 있다는 걸 기억하는 까닭은 나란히 선 아파트 벽면마다 박수근의 그림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상도 아파트 벽화도 미술관이 곧 나온다는 것을 알리는 이정표일까. 이런 생각을 번복할 겨를도 없이 곧 미술관 주차장에 다다랐다. 

주차장 한구석에 ‘정림리아트로드’를 그린 안내판이 서 있었다. 박수근미술관을 구성하는 5개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공예 공방, 공원, 카페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미술관 소재지인 정림1리의 이름을 딴 아트로드의 팔 할은 박수근미술관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박수근미술길’이 적합한데, 정림리아트로드라고 이름 붙인 까닭이 궁금했다. 정림1리를 ‘박수근마을리’로 개칭하는 건이 진행 중이라던데, 박수근의 고향은 곧 박수근마을이라고 믿고 싶은 까닭이 뭘까.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안다고 할 수 없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림리아트로드는 박수근마을리의 시범 구역인 것인지, 지난 20년 새 정림1리의 팔 할이 박수근이어서 박수근마을로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인지, 어찌 된 사정인지 궁금했다. 박수근, 박수근의 그림, 박수근의 고향, 박수근미술관, 박수근마을. 줄기를 잡아당기면 딸려 나오는 감자처럼 주렁주렁한 생각을 한쪽에 부려놓고, 예약한 시간에 늦지 않도록 박수근기념전시관을 찾았다.

주차장과 미술관을 잇는 산책로.

박수근기념전시관 전시장 전경.

지난 5월 7일부터 10월 17일까지 박수근기념전시관에서 열린 아카이브 특별전 ‘한가한 봄날 아기 업은 소녀’는 고(故) 이건희 회장 가족의 기증을 기념하는 뜻에서 기획됐다. 편집부가 방문한 날은 평일인 데다 전시 막바지여선지 매우 한산했다. 전시장에 머문 30여 분간 다른 관람객은 없었다. 이번 특별전 방문객 수가 평소 방문객 수의 10배에 달했다는 기사를 떠올리며 회당 제한된 관객 수가 다 찬 전시장의 광경을 상상해봤다. 이건희 컬렉션이 궁금해 양구를 찾고 박수근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을 그려봤다. 박수근의 그림이라기보다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우르르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의 호젓함을 상상했다. 이건희라는 브랜드에 반응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쪽이 아무도 찾지 않아 텅 빈 쪽보다 나을지 몰랐다. 

지난 20년 새 박수근기념전시관(전 양구군립미술관)을 시작으로 하나둘 지어진 미술관은 모두 다섯 곳. 드넓은 부지에 띄엄띄엄 들어선 미술관들은 제각기 다른 멋을 지닌 훌륭한 건축물이다. 미술관과 미술관은 물론 박수근 부부가 묻힌 묘소와 박수근기념전시관 뒤편 자작나무 숲까지 아우르는 산책로도 잘 조성돼 있다. 전시를 보러 오지 않아도, 근처 주민이라면 산책하러 와도 좋겠다 싶은 쾌적한 길이었다. 이렇게 정성껏 마련한 공간에, 그것도 더 많은 사람에게 미술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공공 공간에 사람이 없다면 안 될 일 아닌가. 박수근기념전시관에서 나와 파빌리온과 현대미술관을 거쳐 퍼블릭전시관으로 이동하며 미관을 염두에 둔 미술관과 아늑한 산책로에 마음이 동했다. 이만큼 잘 가꿔진 공간을 찾는 사람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은 누구라도 좋으니 많은 사람이 찾아오길 바라는 지역의 입장에 가닿았다.

파빌리온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려다본 박수근기념전시관의 모습.

현대미술관 전경.

박수근미술관 내 산책로.

5개의 미술관 가운데 두 곳인 어린이미술관과 퍼블릭전시관은 각각 지난해와 올해 개관했다. 최근 부쩍 적극적으로 박수근을 브랜드화하는 양구군의 행보가 우려스러운 한편 불가해하진 않았다. 더 많은 사람을 지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지역 출신 유명인을 내세우는 것만큼 손쉽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더군다나 지역 출신 유명 예술가를 내세워 지역을 홍보하고 관광 활성화를 도모하는 것은 ‘지방 소멸 시대’에 지역이 할 수 있는 궁여지책 가운데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박수근 역시 양구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브랜드가 되지 못할 까닭이 없다. 

다만 ‘박수근이라는 브랜드’가 마뜩잖은 까닭은 박수근의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브랜드를 자처하는 예술가일 리가 없고, 그가 그런 예술가가 아니라서 그의 그림에 마음이 동한다고 입을 모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수근의 그림을 만든 소박함과 그가 나고 자란 양구의 소박함은 너른 부지에 여러 채의 미술관을 짓는 것도, 양구 곳곳에 박수근의 흔적을 묻히는 것과도 어긋난다. 하물며 ‘박수근마을’을 자처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은가. 소박한 자연에 깃든 삶을 그린 화가와 소박한 자연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버거운 현실의 어긋남이 애달팠다. 이미 양구 곳곳에 박수근을 기입한 지자체로서는 정림1리를 박수근마을리로 바꾸는 것이 문제 되기는커녕 미술관의 적극적인 확장과 맞물려 박수근이라는 브랜드를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방점을 찍는 것일 테다. 지역 문화자원을 백분 활용해 지역을 살리자는 궁여지책에서 박수근이 지향한 소박함과 박수근이 나고 자란 시절의 소박한 양구를 향수하는 것은 뭣 모르고 하는 소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퍼블릭전시관 입구에서 안쪽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면 널찍한 터치스크린과 마주한다. 터치스크린에 뜬 이용자 매뉴얼을 따라 박수근의 작품 가운데 보고 싶은 것을 검색하면 그 그림이 나온다. 벽면의 폭과 길이가 같은 터치스크린은 한 번에 3명씩 이용할 수 있도록 나뉘어 있다. 스크린이 걸린 벽면에 작품이 걸린다면 그림 3점이 걸렸을까. 멀찍이 서서 전시기획자가 보여주는 그림을 보는 관객 대신 스크린을 만지며 보고 싶은 그림을 몇 점이고 골라보는 관객은 얼핏 관객의 ‘진화’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막상 그림을 ‘검색’해본 소감은, 말하자면 컴퓨터 화면 포털 검색창에 작가와 작품명을 입력하고 그 이미지를 얻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술관 소장 작품을 모두 디지털화한 덕분에 인터넷 검색으로는 볼 수 없는 그림도 볼 수 있다는 장점은 간과할 수 없지만, 얼마나 많은 이가 그 장점을 주목할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들었다.

퍼블릭전시관 내 벽면 터치스크린.

퍼블릭전시관 내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전시장 모습.

터치스크린의 양쪽에 있는 전시실은 박수근의 그림을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로 재연했다. 관객이 바닥을 밟으면 꽃이 피고 네 벽면에서는 동영상이 된 그림이 돌고 돈다. 기름기 없는 우툴두툴한 질감의 화면이 반들반들하고 매끄러운 화면으로 윤색된 모습이 낯설었다. 멈춰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텐데, 영상 속 개와 아낙과 농악대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도록 연출된 것임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특별전에서 본 그림들을 떠올렸다. 그림 속 고목 아래 함지박을 인 아낙은 멈춰 있는 한편 걷고 있고, 집 앞 한적한 골목은 한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해의 누르스름한 빛을 내비쳤다. 액자에 걸린 그림은 시간을 품었다면, 스크린을 흐르는 영상은 시간을 풀어낸다. 회화가 미디어아트가 될 때, 매체의 변화가 일으키는 낯섦이 부자연스러움인지 부적절함인지 헷갈렸다. 

퍼블릭전시관의 다른 이름은 ‘라키비움’이다. 도서관(library)이자 기록물 보관소(archive)를 표방하는 공간인 셈인데, 각종 인쇄물이 빼곡한 서가와 자료를 정독할 수 있는 열람실은 없었다. 입구 왼편에 박수근 관련 자료를 모아둔 작은 공간이 있지만, 자료를 편히 열람할 수 있는 여건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 ‘라키비움’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공간이 되려면 더 많은 자료를 모으는 것은 물론, 그 자료를 분류하고 연구하는 역량이 갖춰져야 할 텐데, 이 거창한 이름이 거창하게 들리지 않는 날을 목표로 미술관은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박수근미술관은 도내 공립미술관(현재 강릉시립미술관, 박수근미술관, 인제내설악미술관 이렇게 3곳) 가운데 가장 오래된 미술관이다. 다시 말해 강원도에 처음 지어진 공립미술관이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생애와 화업을 집적한 미술관이자 문화예술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양구에 마련된 대단지 미술관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도내 첫 공립미술관으로서 가장 오랜 역사와 방대한 규모를 갖췄다. 이 같은 상징적 위상은 박수근미술관의 브랜드 가치로 환산된다. 

지난 10월 20일 양구군은 주민 의견 조사 결과를 따라 기존 마을 이름인 정림1리를 박수근마을리로 변경한다고 밝혔다. 정림1리에 거주 등록한 387세대 중 205세대가 참여했고 그 가운데 194세대가 찬성했다고 한다. 양구읍장은 “박수근마을리로 변경되면 이를 브랜드화할 수 있는 만큼 주민소득 증대와 마을 발전에 도움이 될 것”(강원일보, 2021년 10월 21일자)이라고 했다. 지자체와 주민 모두 정림1리를 살려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면, 우리 마을을 살리는 데 박수근만큼 좋은 브랜드는 없다고 부추기는 지자체에 딱히 이견을 내는 주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뜻을 모은 결과 정림1리는 박수근마을리로 이름을 바꿨으나, 바뀐 이름에 걸맞은 내실 다지기는 이제 시작이다. 

유명 예술가의 연고지로 관광 명소가 된 유럽의 여러 마을을 벤치마킹해 정림1리를 문화관광지로 발전시키겠다는 양구의 의지가 씁쓸한 건 이런 의지가 박수근 미술의 소박함과 어긋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박수근미술관과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주택가, 이제는 박수근마을리가 된 미술관 밖 정림1리의 풍경이 박수근마을이라 불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구 곳곳에서 박수근의 그림과 그의 얼굴과 그가 남긴 문구를 봤다. 아파트 외벽에서, 학교 담장에서 박수근과 맞닥뜨릴 때마다 양구의 풍경에 박수근이 오버랩됐다. 유령처럼 반투명한 박수근에 비친 양구의 모습은 물과 기름처럼 불화했다. 박수근마을리는 박수근마을이 될 수 있을까. 박수근마을리가 박수근마을이 되고, 박수근마을리를 품은 양구가 박수근의 고향이 되려면 박수근미술관의 미래는, 박수근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져야 할까. 박수근이 붙은 모든 이름이 박수근을 오롯이 기리고, 박수근마을리라 불리는 마을이 박수근이라는 줄기에 딸려 올라오는 감자 같은 모든 이름을 오롯이 품을 수 있으려면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 보였다. 박수근마을리가 박수근마을이 되기 위해, 박수근마을리가 박수근마을로 살아남는 것은 물론 잘 살기 위해 박수근미술관이 해야 할 일은 그 많은 것 가운데 팔 할 이상일 것이다.

2021. 11.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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