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미술관, 어디까지 가봤니?  
— 지역 미술 현장에서 공립미술관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역할

이나연
제주도립미술관장

지역 미술관, 어디까지 가봤니


지역 미술 현장에서
공립미술관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역할

이나연

제주도립미술관장


이건희 컬렉션이 쏘아올린 공 

한국에서 미술관의 역사를 말할 때 2021년은 유의미한 해로 남을 듯하다. 연초에 이건희 컬렉션 1만 3천여 점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전국 국공립미술관에 기증되면서 미술관 자체와 미술관이 지역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이 모였다. 국가 소유가 된 이건희 컬렉션을 모아서 이건희미술관을 짓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각 지자체가 막대한 예산을 내세우며 미술관 유치 경쟁을 시작했다. 이건희미술관을 짓기만 하면 한 지역의 문화·경제가 곧바로 살아날 듯한 분위기였다. 유명 작품이나 유명 작가의 전시가 아니라 컬렉션이나 미술관 건립 자체가 이렇게 높은 국민적 관심을 받아본 적은 없다. 게다가 이번 관심이 특이한 점은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유치 의욕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술관을 알리고 그 역할에 대해 재고해보는 확실한 ‘전국적’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 각 지역에 하나쯤은 있는 미술관, 작품 전시 및 교육을 위한 곳이라는 개념만 있던 일반인들이 진지하게 미술관이란 무엇이고, 왜 이건희 컬렉션을 모든 지자체에서 모셔가고자 하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도 이중섭미술관 덕에 이중섭 원화 12점을 기증받게 됐고, 그 작품들을 제대로 선보이기 위한 이중섭미술관 시설 확충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시실과 수장고 등을 갖춘 본격 미술관이 생긴 것은 1938년 덕수궁 내에 문을 연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이다. 박물관에서 미술품들만 따로 모아 설립한 방식으로, 이렇게 시작된 한국 미술관의 역사는 아직 100년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미술관의 역할이라면 대체로 흥미로운 기획전시를 하는 근사한 전시장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기획전시는 미술관 속 다양한 기능 중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사실 미술관의 더욱 중요한 고유 기능은 학예연구 인력, 보존처리 전문 인력, 행정과 교육 및 홍보 담당 인력 등을 갖추고, 소장품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관리하며 문화 역량을 쌓는 일이다. 지역 미술관의 경우, ‘지역’을 더하기만 하면 된다. 지역 미술가들의 작품 위주로 소장품을 모으고 관리하면서, 지역 미술사를 정립하기 위해 전문가를 확보해 연구하고, 전시나 교육의 형태로 그 결과를 공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문 인력과 미술관이라는 시설, 소장품 등의 자원을 바탕으로 미술을 매개 삼아 지역 주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기획전시만큼이나 그 지역의 문화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능이라는 뜻이다. 

미술관을 대표할 만한 소장품을 단숨에 확보하면 미술관을 내세워 지역을 문화관광지로 만들기가 쉬워지는 건 사실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해외 유명 미술관의 분관을 유치하는 일도, 미술관으로 도시 브랜딩에 성공한 ‘빌바오 효과’로 회자되며 반복적으로 검토된다. 접근 방식은 달라도 이 모든 일을 해내려면 전문 인력과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건립 당시 지역의 역량에 맞게 지어진 미술관들이 현재 매끄럽게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예산이 적게 책정되거나 전문 학예인력이 터무니없이 적은 문제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지역 미술관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어려움으로 인식된다. 

각 지자체에서 이건희미술관 건립을 약속하며 내놓는 몇천억 원에 가까운 예산들에 놀란다. 미술관은 짓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전시, 보존, 연구, 교육을 위해 매일 움직이는 생명체기 때문에 설립 예산만큼 운영 예산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이건희 컬렉션이 풍성해질 수 있었던 건 당연히 풍부한 재원을 아낌없이 쏟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이미 가지고 있는 우리 지역 우리 미술관에 관심을 돌려봐야 할 때다. 이건희미술관 유치 경쟁은 각 지역 국공립미술관의 현황을 점검하고 제도를 개선하기에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임을 일러주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미술관 전문 인력은 어디까지인가

미술 관련 일을 하는 전문 인력이 모여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미술작품을 연구, 보존, 관리, 전시한다. 그 일의 중심에는 우선 미술품이 있어야 하고, 그 미술품을 보존하고 관리하며 연구하는 인력에게 전시를 위한 공간과 작품 보존을 위한 수장고가 필요해 미술관이 지어졌다는 맥락에서는 그렇다. 닭이 먼저냐 달걀의 문제냐의 고민 없이 모든 것이 매끄럽게 착착 굴러가면 좋을 텐데, 일이라는 게 또 그렇지 못하다. 우선 건물이 지어지는 게 문제다. 건물을 지어야 할 명분이 충분히 갖춰져야 하기 때문에 연구용역이 실시되고, 연구용역보고서 내용 안에는 당연히 지어지는 건물의 규모와 용도에 맞게 필요한 인력이 제시된다. 

물론 건물을 짓는 과정도 순조롭지는 않다. 실행단계에서 예산은 왜 늘 그렇게 부족한지. 애초 기획한 바에서 규모를 줄이거나 자재를 변경하는 일은 수시로 일어난다. 건물을 짓고 나서는, 이제 인력의 문제다. 시설관리인과 행정직, 학예사만 있으면 미술관이 잘 돌아가는가를 묻는다면 글쎄다. 안정적으로 잘 꾸려져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소위 ‘선진사례’를 보면 그렇지는 않다. 

미술관이라는 시설 안에 필요한 인력은 미술관 규모와 상관없이 미술관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검증되어 만들어진 것일 테니 이참에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겠다. 일단 재정담당관(treasurer). 실상 세상의 모든 ‘일’은 예산에서 시작해 정산으로 끝난다. 예산과 정산의 틀 안에서 모든 기획이 다시 세분된다. 보통 공무원들이 맡는 재정담당관의 역할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다음으로 미술관의 기본틀인 연구와 전시를 위한 학예연구사(curator), 미술관의 존재 이유에서 역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가(educator), 그리고 미술관의 활동들을 대중에게 알리는 홍보전문가(marketer)도 필요하다. 열악한 미술관은 학예사가 교육가와 홍보전문가의 업무도 맡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술교육가는 전혀 다른 별도의 영역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만큼이나 그 활동을 대중에게 알리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마케터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기획이며 교육과 홍보 이전에, 그러니까 미술‘관’의 업무 이전에 미술‘품’ 살림을 위해 가장 필요한 직업이 레지스트라(registrar)와 아키비스트(archivist)다. 한국에서는 레지스트라를 예술품 관리원, 소장품 관리원으로 번역한다. 소장품들에 등록번호를 매겨 데이터베이스화한 뒤에 수장고의 적합한 장소에 보관하고, 훗날 전시에 필요할 경우 소장품을 다시 꺼낸다. 레지스트라는 작품과 운명공동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레지스트라 가운데 ‘쿠리에(courier)’라는, 작품과 함께 이동하는 사람의 역할을 세분하기도 한다. 레지스트라와 쿠리에는 소장품의 든든한 문지기이자 보호자다. 장기적으로 보관되고 관리되는 소장품의 기억전달자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예술품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순환직 공무원보다 전담 인력이 배치돼야 한다.

미술관에 꼭 필요한 또 하나의 전문직은 ‘아키비스트’다. 아카이브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키비스트는 보존될 가치가 있는 기록물을 전문적으로 관리한다. 미술관의 아키비스트는 작품, 작가, 전시에 관한 자료들을 평가, 수집, 정리, 분류, 보존한다. 아트 아카이브는 실상 작품을 뺀 모든 자료-도록, 사진, 기록물, 유품 등-를 일컫는다. 레지스트라가 작품 지킴이라면, 아키비스트는 자료 지킴이가 된다. 그리고 이 지킴의 와중에 문제가 생긴 작품들을 치료해주는 이도 필요하다. ‘콘서베이터(conservator)’다. 수장고에 있는 소장품의 보존과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이로 보존 전문가다. 

이 재정담당관, 예술교육가, 보존처리사, 소장품관리원, 예술자료관리원 등 전문성을 갖추고 특화되어야 하는 직업군을 알리고 양성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 전에 미술관에 이 전문가들을 위한 자리가 먼저 마련돼야 한다. 자리가 마련되려면 이 직업이 왜 필요한가를 묻고 답하는 사회적 공론장이 필요하다. 또 미술관에 어떤 전문가가 필요한지 알리는 일은 교육 과정의 하나고, 그 교육을 위해 다시 미술 전문 교육가가 필요하다. 선순환이 시작되려면 일단 어떤 지점이든 파고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어느 한 지점을 파고들며 다양한 부서와 논의하고, 예산을 만들고, 인력을 배치받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지역 미술관 대부분이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지역만의 특별한 미술관

제주는 ‘뮤지엄의 섬’이라 불린다. 미술관, 박물관, 뮤지엄, 테마파크라는 호칭을 넘나들며 제주에 정식으로 등록된 미술관과 박물관은 80개가 넘고,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유사뮤지엄들도 많다. 제주가 피렌체나 파리처럼 문화자원이 풍부해서 뮤지엄이 많아진 게 아니다.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로서, 다른 말로 관광산업의 의존도가 높은 곳이라서 이토록 뮤지엄이 많아진 것이다. 특정 주제를 정해 관련 자료들을 모아 뮤지엄을 짓고 관객을 받아서 입장료 수익을 내는 구조의, 말하자면 ‘뮤지엄 형식 사업’이 많다고 보는 게 맞는다. 이 사업의 특징은 건물 구축과 전시 연출 등을 위한 초기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관리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다양한 성격의 뮤지엄이 있다는 게 제주만의 특성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뮤지엄이 많다는 게 제주의 특성이라면 이제는 이 특성을 잘 살리고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제주도립미술관 전경. ⓒ제주도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전시장 전경. ⓒ제주도립미술관

제주의 공립미술관도 ‘뮤지엄의 섬’ 혜택을 누리며 도민뿐 아니라 관광객까지 모객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며 운영하고 있다.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인기는 실로 놀랍다. 코로나 상황 탓에 비대면으로 운영하는 기간이 길어지긴 했지만, 프로그램 신청자를 모집하면 성인이고 어린이 프로그램이고 할 것 없이 접수 오픈날 마감되곤 한다. 미술과 미술관에 대한 관심, 국공립미술관에서 꾸리는 교육콘텐츠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과 미술관의 특성이 반영된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되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 결국 우리 동네 미술관이 도민과 친해지는 방법은 가장 기본 기능인 연구와 전시, 그리고 교육에 더욱 집중하는 일이겠다.

2021. 11.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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