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지
문화기획소 곳간 대표
손민지
문화기획소 곳간 대표
0. 랜선 투어
「잇다」 편집부로부터 영월의 '구사마켓'을 소개하는 랜선 투어 형식의 글을 써달란 말을 듣고 흔쾌히 그러겠다 했는데 컴퓨터를 켜고 빈 페이지로 며칠을 보냈다. 대신 그 며칠 동안 재생 공간을 채울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던 지난 1년여 간의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멋지게 쓰고 싶지만 글에 소질이 없어서, 진달래장과의 첫 만남, '구사마켓'의 시작, 그리고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고자 한다.
1. 진달래 장의사
영월에서 아주 오랜 시간 존재하며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을 위한 채비를 해주던 곳.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뭔가 오싹한 기운이 느껴진다며 괜히 무섭다고 했다.
무연고 지역인 영월로 이사 온 지 어느덧 5년 차. 나는 이곳에 살기 이전에는 장의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무섭다기보다 좀 흥미로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마지막을 돌봐주는 공간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가.
2. 도시재생
그런 진달래 장의사가 도시재생의 붐을 타고 청년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은 꽤 오래전부터 들려오던 풍문이었다. 문화공간으로서의 쓰임새, 특히나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라니…. 정말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 터는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이 사람들을 위해 곁을 내어줄까. 왠지 이곳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던 차에 도시재생센터로부터 이 공간의 문화프로그램 연구를 맡아달란 제안을 받게 됐고, 떠올린 것이 플리마켓, 이름하여 ‘구사마켓’이었다. 마켓을 열면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지. 재생 공간의 지속가능성은 사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기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첫 번째 과업이었다.
3. 구사마켓
나는 공간이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껏 드러내기로 했다. 어차피 이곳이 장의사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먼저 마켓을 운영하는 스텝들 성에 ‘저승’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손저승, 김저승, 이저승, 주저승, 임저승, 최저승, 고저승…….
우리는 진짜 저승사자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다. 서양의 핼러윈처럼 의상만 입었을 뿐인데 진짜 저세상 텐션을 얻게 되었다. 저승사자들이 짧은 릴스(Reels) 영상을 찍어 공유하자 소셜미디어에서 흥미롭게 봐주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구사마켓은 이색적인 콘셉트가 있는 특별한 마켓이 되었다. 일을 하면서 재미는 덤으로 얻는 이상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4. 사람
플리마켓은 참여하는 셀러(seller)들에 의해 그 성공 여부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판매자의 작품, 인지도, 준비성 등이 중요한데, 플리마켓을 처음 여는 우리에게는 능력 있는 셀러보다 함께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갈 열정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인터넷으로 참여 링크를 만들어 셀러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구사마켓’만의 콘셉트에 부합하는 상품을 개발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모집된 셀러들을 우리는 ‘이승님’이라고 불렀다. 감사하게도 이승님들은 마켓의 성공 여부나 매출 보장보다 재미있는 기획에 주체로 참여하는 것을 더 의미 있게 생각해주었다.
이승님들과 몇 번의 워크숍을 진행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보냈다. 단체복을 맞추고 함께 간판을 만들고 마켓의 규칙도 정했다. 서로 상품개발 아이디어를 보태주는 라운드테이블도 진행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쏟아내다 보면 금방 몇 시간이 지나갔다.
나중에 이승님들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간 첫 워크숍이 가장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처음 만나 어색하게 나누던 인사도, 어느덧 만나면 포옹하는 ‘관계’로 발전되었다. 우리는 구사마켓을 통해 문화적 경험을 공유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5. 소비지옥
지금까지 두 번의 마켓을 열었는데 처음은 구사마켓을 기획하는 데 영감을 준 진달래 장의사에서, 다음은 새로 개관하는 영월 관광센터에서 열었다. 두 번 다 제법 성공적이었는데 특히 지난달 관광센터에서 열린 구사마켓은 무려 천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으며 구사마켓이 지역에서 사랑받는 플리마켓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셀러들이 개발한 상품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소비지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붙여 홍보했는데 사람들은 더 나아가 ‘소비지옥, 사치지옥, 물욕지옥’이라고 불러주었다. 타인의 소비를 지배했던 그 날의 상품들을 사진으로나마 소개해본다.
셀러들이 매번 구사마켓에 선보일 상품을 준비하는데,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상품들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싹 달싹한 아이스크림, ‘저승 간식’과 황천길 꽃신, 갓 모양 선캐처(sun catcher),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커피와 ‘블러드(blood)’ 에이드, ‘지구로더’ 모자, ‘죽이지 마세요’ 부케, 직접 말린 약쑥 스머지(smudge), ‘구사놀라’, 지옥에서 온 냥이, ‘헬조선’ 빵, 유령 수세미, 액운을 막아주는 북어 인형 등 다양한 상품이 개발되었고, 우리는 이제 이 과정을 즐기는 듯하다.
6. 저승소년단
물건만 파는 마켓이 아니라 다양한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전시와 체험, 공연 프로그램들을 선보였는데 그중에서 ‘저승소년단’의 공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저승이들은 자발적으로 매번 새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댄스 퍼레이드를 만들었고 영상을 찍어 플래시몹(flash mob)을 유도했다. 실제로 이승님이 함께 추며 장관을 만들기도 했다. 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저세상 버스킹 존’을 만들었는데 저승이, 이승님 가릴 것 없이 자발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환호했다.
7. 열정
첫 마켓이 열린 7월의 날씨는 폭염 그 이상이었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열정은 날씨보다 더 뜨거웠다. 뜨거운 햇볕에 얼굴이 타고 땀으로 옷을 적셔도 누구 하나 짜증 내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유쾌하고 친절했다.
구사마켓은 재미있다. 다들 뭘 하면 더 재미있을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이 일의 지속가능성은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미 완성되었다.
8. 진심
우리는 요즘 핼러윈 버전 구사마켓을 준비하고 있다. 콘셉트에 진심인 사람들이라 또 한 번의 셀러 워크숍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심으로 재미있는 하루를 보낼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 서로의 아이디어를 듣고 의견을 보태주며 보내는 시간. 언제까지 이 구사마켓을 기획하고 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역살이의 재미를 찾고 사람 사이로 스며드는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전국에 무수하게 많은 프리마켓이 있는데 왜 또 프리마켓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구사마켓은 우리가 얼마나 지역에서 재미있게 살기 위해 고민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창’일 뿐이다.
구사마켓을 기획하며 느낀 것은, 지역에서의 재미를 모색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지역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이 언제든 한 번쯤은 꼭 구사마켓에 찾아와주기를 바라며 주문을 걸어본다. “너는 지금 아무거나 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