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이 양양에 몰고 온 것

한승희

「잇다」 편집부

서핑이 양양에 몰고 온 것

한승희

「잇다」 편집부


모든 것은 ‘육군중앙경리단’에서 시작됐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293-2번지에 있는 이 군사 기관은 현재 ‘국군재정관리단’으로 간판이 바뀌었지만, 맞닿아 있는 900m 남짓한 길(회나무로)에 그 이름에서 유래한 별칭 ‘경리단길’을 선사함으로써 그 흔적을 남겼다. ‘경리단길’이란 비공식 도로명은 ‘망리단길(마포구 망원동)’, ‘송리단길(송파구 송파동)’ 등 다른 동네 어귀에도 붙기 시작했고, ‘객리단길(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조선시대 지어진 ‘전주 객사(現 풍패지관)’ 일대)’, ‘황리단길(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처럼 더 멀리 다른 도시로도 퍼져나갔다. 곳곳에 생겨난 ‘○리단길’들은 선조인 경리단길이 그러했듯 젊은이들의 취향, 호기심, 소비욕을 자극하고 충족하는 공간들이 오밀조밀 이어져 있는 풍경을 공유하고,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일부러 찾아가는 ‘힙’하고 ‘핫’한 동네로 부상했다는 비슷한 내력을 갖고 있다. 


○리단길 유행은 웬만한 비구름도 넘기 힘든 산맥을 훌쩍 넘어 강원도 양양군에도 상륙했다. 2000년대 후반 부산 광안리·송정해변, 제주 중문색달해변에 이어 ‘파도가 깨끗한’ 양양 기시문·죽도해변이 국내 서핑 씬(scene)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양양군도 이러한 흐름을 읽고 ‘송이’와 더불어 ‘서핑’을 지역 부흥의 새로운 구호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서핑 고수부터 초보까지 해마다 많은 사람이 파도를 타기 위해 양양으로 몰리면서 해변을 접한 길에 서핑용품 대여·판매점,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 등 서퍼들을 위한 업소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한적한 바닷가 마을의 풍광을 바꿔놓았는데, 죽도해변과 그 아래쪽 인구해변을 잇는 인구중앙길 일대의 변모가 특히 두드러졌다. 현남면 두창시변리(죽도해변)와 인구리(인구해변)를 잇는 이 시골길은 그렇게 ‘양리단길’이 되었다.

인구해변-죽도해변이 서핑 성지로 입지를 다져가던 2014년 8월, 서퍼들이 선호하는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Patagonia)’가 인구중앙길에 ‘파타고니아 양양점’을 열어 화제가 됐다. 강원도 유일 파타고니아 매장인 이곳이 인구중앙길을 ‘양리단길’로 만드는 데 한몫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참고로 부산에는 파타고니아 매장이 5곳 있으며, 제주도에는 한 곳도 없다.

구름 낀 토요일 오전 6시 50분,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한 양양행 시외버스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최종 목적지가 속초인 이 버스에는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을 든 샌들 차림의 여행객과 ‘저지(jersey)’라 불리는 몸에 꼭 맞는 스포츠 의류 차림에 자전거를 동반한 라이더가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었는데, 버스가 첫 번째 정거장인 양양터미널에 멈춰서자 여행객의 60%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렸다. 대부분 터미널 근처에 머물며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채비를 했고, 양양읍내 구경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들 ‘양양 여행’이 아니라 ‘양양 해변 여행’이 목적인 듯했다.


터미널에서 나와 발길 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9시를 갓 넘긴 토요일 아침이어서일까, 십여 분을 걷는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양양초등학교 인근에 다다라서야 네 발 자전거를 탄 아이와 산책하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아빠가 이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평화로운 아침 산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맞은편 보이는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핑 성지로 등극하기 전까지 양양군의 최고 명물은 ‘자연산 송이’였다. 양양읍내를 알차게 돌아보는 여행 방법으로 ‘숨은 송이 찾기’ 놀이를 추천한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저만치 ‘양양전통시장’ 입구가 보였다. 시장 근처 식당 몇 곳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아침 식사를 하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채워진 식탁은 없었다. 시장 안에도 손님보다는 상인이 더 많았다. 직접 튀겨 만들었다는 튀밥 강정을 파는 할머니 앞쪽에 어린아이 서넛을 거느린 어른 서넛이 서 있었는데, 여행 중 주전부리를 사는 모양새였다. 그들을 따라 시장 밖 큰길로 나와 조금 더 어슬렁대다,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켜고 다시 양양터미널로 돌아가는 경로를 검색했다.

양양터미널로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부동산 광고. ‘동향, 정암바닷가 전망 세컨하우스로 최적’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양양터미널에서 양리단길로 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택시를 타거나(약 15분 소요, 요금 약 3만5000원), 한 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양양-속초 구간 시외버스를 타거나(약 22분 소요, 성인 요금 2800원), 하루 2회(오전 7시, 11시 20분 양양터미널 출발)만 운행하는 12번 농어촌버스를 타는 것이다(약 30분 소요, 성인 요금 1400원). 대부분 가성비를 고려해 양양-속초 구간 시외버스를 택하지만, 예컨대 오전 9시나 10시 즈음 양양터미널에 도착해 읍내를 돌아보며 시간을 보내는 식으로 여유를 부리면 11시 20분에 출발하는 12번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양양 바다’뿐만 아니라 ‘양양’이란 지역이 궁금한 여행객이라면,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는 농어촌버스를 타길 권한다. 운이 좋으면 양양군민 간 대화를 슬쩍 엿들으며 간접적으로나마 참된 ‘로컬 라이프’의 면모를 접할 수도 있다.


터미널에서 승객 14명을 태우고 출발한 12번 버스가 다음 정거장인 ‘양양시장앞’에 섰다. 양손에 장바구니와 검정 비닐봉지를 든 50대 여성이 버스에 올라 빈자리를 찾다 아는 얼굴을 발견했는지 “아이고, 형님!”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서 ‘형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정형외과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형님은 읍내 사우나에 들렀다가 장 보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형님의 물음에, 딸 ‘민정’이 최근 둘째를 낳아서 지난달 내내 민정의 산후조리를 하느라 정신없었다고 했다. 형님과 ‘민정 어머니’는 민정의 자녀들 이야기를 한참 이어가다 돌연 형님의 삼십 대 중반 미혼 아들의 혼사 걱정으로 화제를 바꾸었고, 버스가 ‘하향혈리’를 지날 때쯤엔 동네 반장 선출 이슈에 몰입했다(“어휴, 반장 시킬 인물이 없어요” “젊은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뭐”). 두 사람이 차기 반장 후보로 ‘곱창집 사장’을 거론할 때쯤 버스가 ‘하조대’에 도착했다. 버스에 남아있던 승객 13명 중 8명이 여기서 내렸는데, 모두 커다란 가방을 든 20대 초중반의 여행객이었다. 젊은이들이 우르르 내리자 형님이 민정 어머니에게 “젊은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내리네”하고 평서문으로 묻자 민정 어머니가 “여기가 그 서핑인지 하는 걸로 유명하잖아요”라고 답했다. 하조대 해수욕장은 ‘프라이빗 비치(private beach)’ 콘셉트로 관광 명소가 된 ‘서피비치(Surfyy Beach)’가 있는 곳이다. 


이윽고 버스가 죽도해변이 있는 ‘두창시변리’에 도착했다. 형님과 민정 어머니를 비롯해, 슬리퍼 차림에 별로 든 것 없어 보이는 캔버스 가방을 맨 20대 여성이 내릴 채비를 했다. 인구가 적은 두리·창리·시변리 세 마을이 통합된 두창시변리 주민 90세대1 중 두 집이 형님네와 민정 어머니네였던 모양이다. 두 정거장 뒤인 ‘인구초등학교’에서 내릴 때 버스 안에는 대파가 삐져나온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와 묵직해보이는 부직포 가방을 든 중년 남성만 남아 있었다. 

12번 농어촌버스를 타고 ‘인구1리’에서 내려 마주한 풍경. ‘현남건재철물’, ‘현남슈퍼문구’, ‘고향집식당’, ‘인구마트정육점’ 등 토박이 주민들이 운영하는 가게들과 게스트하우스, 스웨덴어 간판을 단 카페, 일본식 주점, 태국음식점 등 ‘양리단길’에 걸맞는 가게들이 섞여있다.

인구중앙길 도로변에 승용차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인구초등학교에서부터 죽도해변 방향으로 쭉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몇 걸음 옮기니 경리단길 또는 망리단길에 있을 법한 보석 공방이 나왔다. 보석 공방 바로 옆 단층 건물 전면에는 하늘색 파도와 ‘SURF’란 알파벳 4자가 그려져 있었는데, 가게는 아니고 가정집인 것 같았다. 어깨가 굽은 할아버지가 미닫이문 앞에 의자를 내어놓고 앉아있다 간간이 가로수에 매어놓은 파란색 3단 건조망으로 다가가 한 손에 든 파리채를 천천히 휘둘렀다. 할아버지 뒤를 지나치며 곁눈질하니 전갱이처럼 보이는 작은 바다생물들이 건조망 안에 누워있는 게 보였다. 


좀 더 걸어가니 십자가가 달린 키 큰 건물 옆쪽으로 공사장 가림막과 노란색 크레인이 시야에 걸렸다. 가림막 위쪽에 달린 간판에 ‘양양 서프리조트 JD 신축공사’라고 적혀 있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20층까지 높게 올라갈 휴양 시설이었다. 한 기사는 리조트 입주자들만 누릴 수 있는 ‘프라이빗한 인피니티 풀’과 양양 바다 전망을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는 ‘스카이라운지 클럽’이 제공된다고 광고하고 있었다. 사계절 내내 죽도해변과 인구해변 풍광을 사유(私有)하게 될 휘황찬란한 고층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서 있는 광경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공사장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서 있으니, 서핑보드를 든 남녀 한 무리가 공사장 쪽으로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양양 서프리조트 JD 신축공사’ 현장. 바로 옆 현남중앙감리교회는 1910년에 지어진 유서 깊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운영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공사 소음 때문에 예배를 진행하기 어려울 터였다.

인구중앙길 인근 전봇대에 붙어있는 또 다른 신축 리조트 투자 광고. 서핑의 인기에 힘입어 양양 해변은 ‘서핑 성지’를 넘어 ‘투자마크’가 되어가는 중이다.

어쩐지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해변 쪽으로 경로를 틀었다. 날이 흐린 탓인지, 혹은 파도가 좋지 않은 탓인지(서핑은 말할 것도 없고 수영도 못하는 사람으로서 알 길은 없다) 해변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붐볐다. 수심이 낮은 물가 군데군데에 같은 디자인의 서핑 수트를 입은 열댓 명이 보드를 잡고 둥둥 떠 있었다. 무리마다 호루라기 같은 것을 목에 건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짓을 섞어가며 큰 목소리로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핑이 좋아서 양양에 터를 잡고 서핑용품 대여·판매점이나 게스트하우스 등을 운영하며 서핑 강습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하는 서퍼들이 제법 많아서, 덕분에 아무런 준비 없이 맨몸으로 온 여행객들도 손쉽게 생애 첫 서핑을 체험할 수 있었다. 지금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이들 중에도 태어나 처음 서핑 보드를 만져보는 사람이 많은 듯 보였다.

양양의 서핑 성지로 꼽히는 죽도해변. 한편 서핑 고수보다는 생애 처음 서핑을 배우려는 여행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래 위에 앉아 한참 타인의 생애 첫 서핑 시도 장면을 목격하고 있자니,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미끌미끌해지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다시 인구중앙길로 나왔다. 체온을 높이고 기운을 북돋을 겸 ‘양리단길 카페’ 한 곳에 들어가볼까 싶었으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결국 왔던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어디선가 자동차들이 계속 몰려와 이미 포화상태인 도로변에 혹시 빈자리는 없는지 찾아 헤맸다. 문득 12번 농어촌버스에 동승했던 두창시변리 주민 두 사람이 생각났다. 형님과 민정 어머니에게는 서핑이 바꿔놓은 마을 풍경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메밀꽃밭 뷰’가 특색인 양리단길 유명 카페가 나왔다. 동남아시아 해변에서 볼 법한 밀짚 파라솔이 달린 야외 테이블은 빈자리가 나기 무섭게 다시 채워졌다. 카페 주변은 강원도 농촌 마을 어디서나 볼 법한 풍경이어서, 메밀꽃밭 뷰가 있는 카페의 존재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이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제 슬슬 양리단길을 벗어날 시간이었다.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켜고 양양터미널행 시외버스 정거장 인근인 ‘인구마트정육점’을 목적지로 설정하고서 앱이 이끄는 대로 걷는데, 옥수수가 심긴 삼각형 땅뙈기에서 낯익은 인물이 호미로 잡초를 고르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양리단길에 발을 들였을 때 마주쳤던 전갱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둔한 거동으로 여기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와 해변에서 서핑을 하든, 그래서 쉴 틈 없이 자동차가 몰려오든,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자본이 해변에 고층 건물을 올리든, 할아버지는 느리지만 바지런히 전갱이를 말리고 옥수수를 돌볼 것이다. 할아버지와의 우연한 재회로 양리단길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1)  양양군 웹사이트에 공시된 <제58회 양양군 통계연보(2019년 말 기준)> 중 ‘인구’ 참조. 두창시변리의 총 세대 수는 통계연보에 표기된 두리(35가구), 창리(17가구), 시변리(38가구) 세대 수를 합한 것이다. 양양군 웹사이트의 ‘지명 유래(https://www.yangyang.go.kr/gw/portal/yyc_yyintro_origin?content_id=600245)’에 따르면 ‘주민의 인구수가 적어 3개리(두리, 창리, 시변리)를 합하여 두창시변리’가 되었으나, 세 마을이 통합된 시점은 확인할 수 없었다.

2022. 07.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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