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원 작가
『아무튼, 무대』 저자
황정원 작가
『아무튼, 무대』 저자
각자의 고단한 일상과 서로에게 지친 한 중년 부부가 묻는다. ‘우리, 계속 같이 살아야 하는가?’ 한밤중에 논쟁을 시작한 부부는 부엌과 거실을 연신 오가며 서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영국 국립극장(이하 국립극장)이 제작한 연극 <Middle(미들)>의 줄거리다.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 부부의 집이 배경인 만큼 무대의 반은 널찍한 부엌으로, 남은 반은 흠잡을 데 없이 잘 정돈된 거실로 만들어졌다.
국립극장이 무료로 운영하는 ‘터치 투어(touch tour)’ 덕분에 무대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다. 터치 투어는 시각장애가 있는 관객이 눈이 보이는 관객과 최대한 동등하게 극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투어 참가자들은 동반자, 혹은 안내견과 함께 무대 위에 올라 세트와 소품들을 직접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다. 그래서 ‘터치’ 투어다. 투어와 이어지는 본 공연에서는 음성해설가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해설한다. 해설이 필요한 관객은 따로 마련된 창구(Access Support : 장애가 있는 관객을 위한 모든 서비스를 일괄적으로 제공하는 창구)에서 헤드셋을 대여해 착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눈이 보이지 않아도 연극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 창구 안내문. ⓒ황정원
음성해설을 들을 수 있는 헤드셋. ⓒ황정원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안경. ⓒ황정원
손끝으로 접하는 무대 : 터치 투어
<Middle>의 터치 투어는 음성해설가 로즈 차머스(Roz Chalmers)가 맡아 진행했다. 로즈는 무대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투어를 시작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을 중립적으로 기술하는 듯했지만, 그 설명의 진가는 연극을 끝까지 관람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설명 속에는 마치 길을 찾기 위해 뿌려 놓은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같이, 극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시각 정보들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흘리지 않아 연극의 재미는 관객 각자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겼다.
예를 들어, 거실 소파가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배치되었다는 정보는 중요했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부부는 잠시도 한 소파에 나란히 앉지 않는다. 아내 매기(Maggie)는 앉아 있다가도 남편 개리(Gary)가 다가오면 견딜 수 없다는 듯 황급히 일어나 맞은편 소파로 자리를 옮긴다. 혼자 덩그러니 남는 개리. 빙글빙글 쳇바퀴 도는 듯한 그들의 대화만큼이나 소파를 사이에 두고 가시적으로 번복되는 움직임에서 부부 사이의 긴장감은 더욱 도드라진다. 냉장고에 덕지덕지 붙은 아이의 그림, 사진, 학교 안내문과 커피 테이블 밑에 수북이 쌓인 보드게임과 장난감 또한 중요한 극적 장치이다.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부부 생활 전반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아이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로즈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출연 배우들이 등장했다. 무대에 오른 그들은 자기소개와 더불어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투어 참가자들은 배우들과 유쾌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등장인물과 배우의 목소리를 미리 연결 지었다.
배우들이 퇴장하자 로즈는 참가자들에게 마음껏 돌아다니며 뭐든 만져 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이런 순서가 익숙한 듯 제각기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대기하던 스태프들이 기민하게 움직여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시간은 손끝으로 읽을 수 없는 극적 장치를 익히는데 쓰이기도 한다. 한 참가자는 스태프에게 사진 속 아이가 몇 살 정도로 보이는지 물었다. 옷걸이의 옷들을 만져보는 참가자에게 걸려 있던 와인색 옷 한 벌을 건네며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후드티라고 귀띔하는 스태프도 있었다. 남자 주인공 개리가 열렬히 응원하는 축구팀이다.
“그래서 얼마가 드는데요?”
슬쩍 로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고맙게도 투어가 끝나고 따로 시간을 내주었다. 로비 카페에 자리를 잡고 대화를 시작하는데 그가 느닷없이 물었다.
“지금 쓰는 글의 목적이 뭐예요?”
입으로 가져가던 커피잔을 멈칫했다. 터치 투어와 음성해설이 시각장애인들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돕는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공연을 볼 수 있는 삶, 그것도 가족과 혹은 친구와 함께 나란히 앉아 같은 연극을 감상할 수 있는 삶은 그렇지 못한 삶과 크게 다를 터이다. 장애를 가진 관객도 공연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도덕적 호소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조금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 보고 싶었다.
“한국 극장도 터치 투어와 공연 음성해설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아마도 바로 이런 질문을 들을 거예요. ‘그러려면 얼마가 드는데?’ 그 대답을 찾고 싶어요.”
로즈는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터치 투어 자체는 거의 비용이 들지 않아요. 투어는 늘 공연 한 시간 반 전에 시작해서 30분 정도 진행되는데 그 시간이면 어차피 모든 스태프들이 극장에서 대기 중이거든요. 이미 출근한 스태프들의 인력을 활용하니 딱히 추가로 돈들 일이 없어요.”
생각해 보니 그도 그랬다.
“그럼 음성해설 비용은요?”
“초반에는 콘솔(console : 입력된 음성 신호의 음량과 음질을 조절하는 장비)과 헤드셋 같은 기본 인프라 비용이 필요하지만 금액이 크지 않죠. 이후에는 작품 당 해설 비용이 들어요.”
로즈의 설명은 길게 이어졌다. 국립극장의 음성해설가는 해설 대본을 쓰고, 터치 투어를 운영하며 이어지는 본 공연에서 음성해설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400 파운드(한화로 약 62만 원)를 받는다.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과 품을 생각하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액수였다.
“음성해설을 지원하는 극장 중에서도 국립극장이 가장 넉넉하게 보수를 주는 편이에요. 다른 극장들은 이 금액에 크게 못 미치거나 자원자 위주로 운영하기도 해요. 그런데 자원자 위주가 되면 음성해설의 질을 보장할 수 없죠. 또 음성해설을 하는 사람도, 이용하는 사람도 해설을 일종의 자선 행위로 인식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이용자 입장에서도 불만을 제기하거나 제안을 내놓기 힘들어져요. 하지만 터치 투어와 음성해설은 시혜나 호의가 아니에요. 극장에서 제공하는 다른 일반적인 서비스와 같이 관객의 기본 권리로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돈을 주고 전문가들의 노동을 사는 것이 필요하죠.”
대화는 자연스레 음성해설로 옮겨 갔다. 터치 투어 중 마음에 걸린 부분에 대해 물었다.
“부엌 커튼을 ‘취향이 고상한’ 무늬와 색이라고 묘사하셨죠. 눈이 보이는 사람은 직접 커튼이 고상한지 아닌지 평가하잖아요. 당신의 설명을 듣고 커튼을 상상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고상하다’는 단어를 들으면 누군가의 의견을 듣게 되는 거 아닌가요?”
로즈는 ‘고상하다’는 자신의 평가가 아닌 세트 디자이너의 해석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디테일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단어 하나하나에서 자신의 주관적 해석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제작진의 의도를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해 상상 이상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 개리의 외모를 묘사하는 짧은 문장을 생각해 봐요. 개리를 맡은 배우는 배가 좀 많이 나왔어요. 최근에 비평가 한 명이 그의 외모에 대한 신랄한 평을 써서 상처를 크게 받았죠. 하지만 눈에 보이는 배우의 외모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해요. 배우의 외모는 캐릭터를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장치이고, 일반 관객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보는 시각장애인들도 인지하고 나름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는 음성해설 대본 제작에 앞서 배우들에게 질문지를 돌린다고 한다. 그렇게 배우들이 직접 묘사하는 캐릭터를 참고한다. 또한 연출가, 세트 디자이너, 무대 감독 등 창작진들과 긴밀히 소통하고 리허설에 참가하여 이들의 제작 의도와 부각하고 싶은 시각적 효과들을 파악한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취합하고 반영하여 해설을 만든다. 공연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자부심, 책임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해요. 극장이 음성해설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끝이 아니에요.”
깊이 감탄하고 있으려니 대화의 초점이 다시 옮겨갔다.
“먼저 이런 서비스에 대한 홍보가 잘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각 장애인들이 직접 극장 홈페이지에서 음성해설 서비스가 진행되는 공연을 찾고, 좌석을 고르고, 티켓을 구매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그 극장의 홈페이지가 시각장애인들에게 얼마나 접근성이 좋은가라는 질문이 남아요. 스크린을 읽어주는 기능이 있는가? 이미지들을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가? 총 몇 번을 클릭해야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가 등을 생각해 봐야 하죠.”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또 다음 단계가 있었다.
“그리고 나면 극장 자체가 얼마나 접근하기 쉬운지 고려해야 해요. 장애인을 위한 주차 공간은 어떠한가, 동반한 안내견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어디에 있을 것인가 등 생각해야 할 디테일이 많죠. 또 시각장애인들이 실제로 극장에 왔을 때 그들을 보조할 극장 스태프 또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해요. 장애에 관해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는 법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는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훈련이 선행돼야 하니까요. 막상 시각 장애인이 혼자 공연장을 찾았을 때 좌석까지 안내하는 사람이 없거나, 있더라도 무심코 ‘저를 따라오세요’와 같은 방식으로 안내하면 안되죠.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안내자를 보고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극장 전반에 걸친 인프라가 구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실현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해와 합의를 얻어내야 할까? 터치 투어와 음성해설에 관해 딱 떨어지는 숫자 하나를 얻고자 질문을 던졌는데 대답은 단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답을 찾아 갈수록 장애에 대한 나의 무지와 몰이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내 낯빛을 보더니 로즈가 서둘러 덧붙였다.
“나는 아주 이상적인 상황을 당신에게 알려줄 따름입니다. 각 극장은 제각기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발점이 어디든 일단 시작은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거기서부터 최선을 다해 점점 나아가면 되는 거죠.”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지만 낙관적인 태도를 잊지 않는 전문가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니 참으로 겸허해졌다.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 본 공연 때 사용할 헤드셋을 대여하러 따로 마련된 창구로 향했다. 창구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헤드셋 외에도 청각장애인을 위해 국립극장이 개발한 자막안경을 대여해주고 있었다.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스태프 뒤로 조금 전 터치 투어 때 본 안내견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혼자 ‘고립’되거나 ‘배제’되지 않고 함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배리어(barrier, 장벽)를 없애주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 공연. 베리어프리 공연을 현실적으로 실행하는데 가장 큰 장벽은 무엇일까. 돈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