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보다 많은 이야기


평창 진부 오일장 르포

한승은

「잇다」편집부

산보다 많은 이야기
– 평창 진부 오일장 르포

한승은

「잇다」 편집부


진부 오일장을 찾기 전 검색 결과 적다면 적은 정보가 한눈에 들어왔다. 진부 오일장의 역사 관련 자료, 진부 오일장을 찾은 사람들의 방문기 모두 적다면 적었다. 적은 정보는 오히려 약이 되는 법. 말간 눈으로 진부 오일장의 풍경을, 장터를 감싼 면내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진부의 참모습을 가린 기대감을 비유하듯 강릉에서 진부로 가는 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비가 내렸지만 이렇게 짙고 두꺼운 안개가 낄 만큼 쏟아지진 않았다. 지리적인 현상이려니 생각하며 오랜만에 만난 안개의 장관에 감탄했다. 뒤에 오는 차를 위해 깜박이는 비상등 불빛을 따라 한참 안개 속을 지났다. 터널 몇 개를 통과해야 하는 짧지 않은 길을 지나 순간 거짓말같이 안개가 사라졌다. 강릉과 평창의 경계를 명시하듯 짙게 깔린 안개 너머 탁 트인 진부의 풍경이 펼쳐졌다. 안개가 흩어지자마자 곧 진부로 들어서는 관문이 보였고, 고속도로를 벗어나 하진부천을 따라 달리자 이내 진부 면내로 들어섰다. 마침 진부는 올해 강원작가트리엔날레 개최지여서 행사를 알리는 광고물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짙은 초록색 바탕에 ‘사공보다 많은 산’이라는 행사 슬로건이 하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사공보다 많은 산. 흥미로운 문구라고 생각하며 안개 사이로 얼핏 보인 둥근 산자락을, 첩첩산중의 파노라마를 떠올렸다.

비 오는 날의 오일장 

오후에는 비가 그친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온 길인데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고 이따금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천변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진부전통시장 쪽으로 걷는 길은 텅 비어있었다. 문을 연 가게가 몇몇 있었지만 조용했고 지나가는 사람도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치더라도 흐린 날이니만큼 왁자지껄한 장터 풍경은 기대할 수 없겠다 각오했지만, 지레 아쉬움이 엄습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된다고, 섣부른 아쉬움을 떨쳐 내며 장이 선 길목으로 들어섰다. 하진부천까지 걸어서 10분이 채 못 되는 거리에 진부전통시장이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에도 천막을 치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상인들과 시장을 찾은 손님 몇 명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매대에 가지런히 놓인 표고버섯이며 고등어 등을 보고 있으려니 빗속에 천막을 치고 팔 것을 늘어놓은 상인들의 수고가 느껴졌다. 채소, 해산물, 약재 같은 식재료부터 두부, 묵, 떡 같은 가공식품에 머리핀, 모자, 옷 같은 공산품까지.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모두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어묵꼬치, 도넛, 부침개 등 갓 만들어 파는 먹거리도 있어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도 거뜬했다. 마침 음식을 파는 한 상인은 천막 한쪽에 간이 탁자와 의자를 여럿 마련해뒀고, 모든 자리가 차 있었다. 추적추적 비도 내리겠다, 막걸리 병과 메밀전 접시가 탁자마다 놓여있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천막 가까이에서 큰 음악 소리와 진행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씩씩하고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장 안에 마련된 광장과 무대는 음악이든 연극이든 상관없이 공연할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무대 위에서는 한 아이가 요즘 유행하는 듯한 가요의 랩을 열심히 외고 있었고, 아이의 가족을 비롯한 몇몇 관객이 박수를 쳤다. 노래를 다 부른 아이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진행자는 이어지는 제기차기 프로그램을 안내하며 참여를 독려했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방금 노래를 부른 아이가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다. 흥을 돋우는 진행자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밝고 경쾌했다. 관객이 없어도, 반응이 없어도 꿋꿋한 목소리는 궂은 날씨와 대비를 이루며 잿빛 하늘과 비바람을 더욱 스산해 보이게 했다. 진행자의 요청에 부응할 용기가 없었으므로 광장에 서 있기가 다소 민망했다. 과연 제기차기 프로그램은 무리 없이 진행했을까. 진행자만큼이나 당찬 아이와 제기차기 승부를 겨룰 지원자가 나오지 않은 가운데 광장을 뒤로하고 장터 밖으로 나왔다.

장터 끝자락에서 평창한의원이 있는 건물을 돌아 진부초등학교로 향하는 내내 뮤지컬 주제가로 추정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무언가를 사고 구경하는 이들이 제법 있는 장터와 달리, 장터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등하굣길엔 아무도 없었다. 오가는 것은 비바람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텅 빈 거리의 배경음악이라기엔 생뚱맞게 격정적이라고 생각하다가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조합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갑자기 거세진 비바람 소리와 온 동네에 울려 퍼지는 노래의 절정 부분을 들으며 주위를 살폈다. 초등학교 부근답게 문구점과 미술교습소가 있었다. 오늘은 휴일이니까 학교도 미술교습소도 문구점도 모두 조용하지만, 평일인 내일이면 다시 활기를 띨 거리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 벽에는 평창군의 마스코트 ‘눈동이’가 그려져 있었다. 눈동이보다 오래전에 지어졌을 구축 아파트 벽에 그려진 눈동이를 보며 ‘왜 눈동이를 그렸을까’ 궁금해졌다. 진부 오일장과 눈동이, 그리고 진부초등학교. 평창군 진부면의 해시태그라 할 만한 상징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을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할 테고, 특정 장소나 행사, 마스코트 등으로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테다. 하지만 진부 오일장도 눈동이도 진부초등학교도 모두 지금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걸, 진부초등학교 정문에 서서 문득 깨달았다. 그 숨은 이야기가 궁금했고, 더 많은 사람이 나처럼 궁금해하길 바랐다. ‘넓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운동장은 진부초등학교의 역사를 짐작하게 했다(지은 지 오래될 수록 운동장이 넓은 학교가 많다). 조선시대에서 이어져 온 진부 오일장과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진부초등학교는 분명 진부면의 랜드마크이자 이야기 보고(寶庫)다. 시끌시끌하고 북적거리는 장터와 아이들의 생기가 흘러넘치는 학교는 보지 못했지만, 그래서인지 뜻밖의 상상력이 부풀었다. 분명 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테다. 적적한 장터와 학교의 ‘위용’은 스산한 날씨 덕분인지 인적이 드문 덕분인지 가장자리를 굵은 선으로 그린 그림처럼 도드라졌다. 진부의 중심이 되는 시장과 학교가 진부라는 지역의 시간과 지역민이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쌓인 이야기의 표본이길 바라며, 진부다움을 이야기하는 거점이길 바라며 진부시외버스터미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날이 장날

공교롭게도 강원작가트리엔날레 전시장 중 한 곳이 시장 인근에 있었다. ‘컨템포러리LOOK’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에서 진부라는 지역과 진부 주민의 현재를 조명하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한쪽의 유리 통창 밖에서는 안에 걸린 작은 그림들이 보였다. 알록달록하고 밝은 색감을 눈으로 훑으며 진부의 색은 어떤 빛일까 문득 생각했다. 화사한 그림이 품은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궁금해하며, 유리 통창에 맺힌 빗방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우산을 흔드는 비바람이 거세져 서둘러 건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바로 보이는 벽에 ‘일상예술전’이라는 전시 제목과 함께 전시 내용을 소개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진부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관통하며 작가의 제삼자적 인식과 얽힌” 작품들을 소개하는 자리라는데, 진부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작가마다 다른 시각언어로 표현하는 시도가 반가웠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오른쪽 벽에 걸린 커다란 화면에서 영상이 흘러나왔고, 화면과 마주 보는 데에는 두꺼운 커튼으로 에두른 공간이 있었다.

커튼 뒤편에서 방문객을 맞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빗길을 걷고 들어온 신발 자국을 닦는지 걸레질을 하는 중년 여성이 보였다. 전시장을 관리하고 관객을 맞는 봉사자였다. 자리를 잡고 영상을 보는데, 진부 주민이기도 한 전시 지킴이가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살뜰하게 들려줬다. 작가에게 직접 들은 작품 창작 배경과 과정은 물론, 진부 주민이기에 알 수 있는 지역적 맥락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설명은 도슨트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인데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전시에 참여한 한 작가의 생가터에 작가가 직접 지은 건물에서, 작가의 삶이 깃든 장소임을 의식하며, 지역민 어르신과 어린이가 진부의 어느 숲속을 보여주는 퍼즐을 맞춘 다음 그 앞에 서서 활짝 웃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바라보고 있자니 뭉클했다. 두껍게 늘어뜨린 커튼 너머 방석과 쿠션이 마련된 방 안에 앉아 밤하늘의 별빛처럼 어둠을 가로지르는 조명 불빛에 홀리는 것도 아늑했다. ‘회상의 방’이라는 제목답게 기억에 잠긴 방은 고요했다. 작가의 생가 자리에 마련된 전시 공간 안 작은 방은 진부와 작가 사이의 내밀한 기억을 소환하는 곳인 한편 방을 찾는 누구나 진부와의 추억을, 인연을 불러내고 새기는 곳이기도 하다. 빗속을 오래 걷다 들어가 앉은 터라, 아늑한 방안은 새삼 아늑했다. 이대로 맥이 풀리기 전에 일어나야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까지 배웅하는 전시 지킴이를 향해 거듭 고개 숙여 인사하고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향했다. 스마트폰 지도 앱에서 본, 진부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 서림관광호텔은 다른 건물보다 높이 솟아 있었다. 서림관광호텔 간판을 보며, 방금 감상한 작품들을 떠올리며 걸었다. 작가마다 진부를 이야기하는 방식도, 진부를 이야기하는 모습도 다 다르다. 서로 다른 사람, 서로 다른 작품 사이에 숨 쉴 여지가 있다. 숨 쉬는 장소, 즉 살아있는 장소가 모여 살아있는 지역이 된다는 걸, 그리고 그곳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진부한 깨달음을 새삼 곱씹었다. 작고 알찬 전시장에 머문 짧은 시간의 여운은 길었다. 진부를 이렇게 볼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다니. 마침표 대신 물음표와 느낌표를 남긴 전시는 작가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각기 달리 표현하는 진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했다.

장터에서 필요한 걸 사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인근 전시 공간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상을 떠올렸다. 강원작가트리엔날레가 아니라도 지역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지역민이 참여하는 미술 행사를 여는 등 작지만 큰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적지 않다. 공공기관에서 주도하는 대형 행사만이 아니라, 문화 복지에 관심 있는 여러 주체가 모여 지역 작가와 문화예술 관련 종사자의 활동을 돕는 소소한 사업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이 잇따랐다. 비가 와도 오일장이 열리는 ‘그날’이면 어김없이 천막을 치고 물건을 부리는 사람이 있듯, 찾는 이가 있든 없든 ‘그 자리’에서 지역 문화를 기록하고 재생산하는 사람이 있는 풍경을 그려보며 천천히 걸었다. 


150년과 150미터    

오일장이 열리는 날은 가게 문을 열지 않는지, 비가 와서 손님이 없을 것 같아 쉬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문을 연 상점은 드물었다. 천막 뒤편의 상가 건물에는 옷가게, 식당, 카페 등이 있었다. 장이 열리지 않는 날에는 이 가게들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겠지. 옛 버스터미널 공터부터 진부초등학교 앞에 이르는 길에 섰다는 오일장의 역사는 무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 과거 강릉 바닷가에서 잡은 오징어를 들고 그 먼 길을 걸어왔을 오일장의 풍경을 상상해봤다. 오일장이 아니라면 무언가를 사고파는 일이 없었을 곳에 이젠 오일장과 무관하게 문을 열고 닫는 다양한 가게들이 생겨났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오늘날 익숙한 진부전통시장의 모습으로 바뀐 이래 시나브로 변화를 겪었을 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금이라도 오래된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조금이라도 예스러운 정취를 찾는 까닭이 뭔지, 스스로 의아해하다가 문득 17년 전 오대산 월정사에서 템플 스테이를 하러 진부시외버스터미널에 들렀던 기억이 났다. 그때 휑뎅그렁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터미널은 터미널이라 하기에 뭣한 매표소에 가까웠고, 주택인지 상가인지 불분명한 건물이 드문드문 서 있는 주변에는 다소 생뚱맞게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150여 년 전 또는 60여 년 전까지 돌아갈 것 없이 17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지난 2018년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KTX 역이 생기고 개발 바람이 불었겠지. 올림픽 덕분에 진부면 주민들의 보다 편한 이동을 보장하는 교통수단이 도입됐고 편리해진 교통 덕분에 주민 수가 늘면서 상가가 번성하고 신축 아파트가 들어섰겠지. 이런 ‘발전’은 전국 각지가 소멸 위기에 처한 근래 분명 반길 만한 일인데도 가슴 한구석이 스산했다. 편리함을 확보하면서도 그 지역만의 고유한 정취를 잃지 않길 바란다면 욕심일까. 천편일률적인 발전상을 따르지 않고, 진부에서 나고 자란 삶의 역사에 스며 있는 진부다움을 발견하며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다행히 나지막한 건물과 번잡하지 않은 읍내의 상점가는 개발 광풍에 빗겨 있었음을 방증하는 듯 보여 안도했다. 지나치지 않은 변화는 소박함을 잃지 않았다. 이 소박함 덕분에 개발 광풍의 우려가 들지 않는다고 안도한다면, 자위(自慰)에 불과할까.  


150미터 남짓한 길에 선 오일장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하진부천과 지척에 있는 진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진부초등학교까지 400미터 남짓한 거리임을 감안하면 진부 오일장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지만, 작지 않다기보다 크지 않다는 쪽에 손을 들게 되는 까닭은 장터의 소박한 풍경 때문인지 몰랐다. 인터넷 지도상에서 장이 열리는 거리를 재보니 약 150미터, 도보로 2분 걸린다고 한다. 150년 전 150미터 안팎의 길에 늘어선 진부 오일장은 물리적인 규모도 크지만 그 영향력은 더 큰 시장이었을 테다. 평창에서 가장 큰 오일장으로 위용을 떨쳤던 진부장과 전국적으로 오일장의 영향력이 약해진 오늘날 오일장의 명맥을 유지하는 진부장은 같은 진부장이라고 하기에 낯설었다. 궂은 날씨 탓에 바삐 움직이느라 30분 안에 다 둘러봤다는 변명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날씨만 화창했다면 얼마나 더 머물 수 있었을까. 2분 거리를 1시간 거리로, 한나절 거리로 만드는 힘. 그 힘을 상상했다. 상상 속 옛 진부 오일장과 활짝 갠 날도 아닌 궂은날 둘러본 현 진부 오일장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이야기가 지층처럼,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을 진부의 속내를 궁금해하며, 안개처럼 드리웠다 걷히는 이야기를 다채롭게 풀어갈 사람의 힘을 기대하며 하진부천을 건너 공영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20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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