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라
영화평론가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애플>(크리스토스 니코우 연출)에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작스러운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대형 병동으로 인계된 이들은 가족이나 친구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영영 병원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 병의 증상은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일뿐더러, 사회 전반에 문화적/정치적으로 약속된 공통 질서나 의식까지 망각하는 것이다. 신원 미상의 이들은 원래 갖고 있었을 이름 대신 번호가 매겨져 호명된다. 14842번으로 불리게 된 주인공은 ‘새로운 자아’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리셋하는 과정에 놓인다. 이 프로그램은 각 환자에게 일정한 생계를 유지하게끔 의식주를 마련해주고, 녹음기를 통해 매일 해야 할 일을 알려줌으로써 이들이 새 삶에 적응해나가도록 독려한다. 환자들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통해 매일의 ‘미션’을 완수했음을, 그리하여 프로그램이 원활히 진행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모쿠슈라픽쳐스
사진은 증명에 용이하다. 사라진 과거를 불러오는(remind) 데 유력한 수단이기에 사진은 자주 증거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애플>이 연출한 허구적 세계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여하간 본작의 배경을 감싸고 있는 요소 중 주요한 것은 바로 아날로그적 표지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녹음기는 물론, 영상이 아니라 사진을 촬영하는 점, 현대 디바이스들(PC, 스마트폰 등 오늘날 익숙한 기기들)과 감염병 시대의 미디어 등이 지나치게 소거되어있는 점 등은 역으로 아날로그적 상황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면서, 첨단 기계는 있으나 그것이 보편화하지는 않은 시대로서 <애플>의 시공간을 모호하게 처리한다. 이 모호함과 함께 <애플>은 (작금의 인식에 기반할 때) ‘불완전한’ 카메라라는 요소를 짚는다.
달리 말해 <애플>에서 카메라는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는 엄숙한 장치이지만, 동시에 기술적으로 결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매우 경직된 조건을 수반해야 간신히 작동 가능한 기기이다. 그리하여 <애플>에서 자주 요청되는 주문은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남자가 처음 병동에 들어온 장면에서 의료진은 일렬로 앉은 사람들을 향해 한 명씩 번호를 불러 카메라 앞에 서게 한다. 정면을 바라보는 개별적인 얼굴(들). 이렇듯 사진에 찍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앞에 설 것, 잠깐 멈출 것. 물론 우리는 움직이는 동안에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포착될 수 있고, 운동 중에도 중단된 이미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 또한 카메라의 역능이지만, 더 ‘정확하고’ ‘순수한’ 얼굴을 발견하기 위해 피사체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규율로 자리매김해 있다. 카메라는 피사체에서 능동성을 박탈하며, 우리는 그 앞에 우리를 가감 없이 내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거울을 바라보며 촬영하거나, ‘셀카’를 찍을 때처럼 렌즈를 통제하는 입장인 동시에 프레임에 담기는 입장을 함께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불분명한 시공간적 배경과 연동되어, <애플>의 인물들은 강박적이리만치 카메라 뒤에서는 찍힐 수 없다는 관점을 굳게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카메라의 소유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나를 그 앞으로 무방비하게 가져다 놓아야 하는 수동성이 내재된 상태로, 인물들은 사진을/에 찍는/힌다. <애플>이 카메라라는 도구와 사진이라는 요소를 통해 제기하려는 질문은 당연히도 본작의 서사적 토대가 되는 기억상실증과 유관하다. 사진이 갖는 장점은 그것이 추억을 향유하기 위한 기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한편, 사진은 시간의 일부이자 파편으로만 존재하여 전체가 품고 있는 방대한 세부를 소외시키기도 한다는 양면 또한 지닌다. 결과적으로 <애플>에서 찍힌 사진들은 추억을 향유하는 기본적인 기능을 발현해내지 못한다. 촬영이라는 행위는 프로그램의 유지를 위해 목적론적으로 수행될 뿐, 사진은 기억을 되찾아주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환자들이 사진을 통해 시간을 박제하거나 보존함으로써/함에도 도리어 증상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애플>은 사진이 지금 존재하는 현실의 생생한 감각과 세부까지는 포함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노출한다. 달리 말해 <애플>에서 피사체가 되는 인물들은 기억을 잃었다는 정보와 함께 가장 연약하고 무기력한 위치에 놓이는 듯 보이지만, 앨범에 모인 사진들이야말로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기록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부재하는 사물로서의 사진 이상도 이하도 아님이 발각된다.
현재와 과거를 잇는 사진의 쓸모가 없어진 한, <애플>에서 시제란 영화가 마음대로 자르고 이어 붙였을 따름인, 딱히 쓸모가 있지 않은 요소지만 동시에 그 효력 없음으로 인해 현재의 중요성을 배가하는 데 기여한다. 와중에 우리는 주인공 남자가 늘 시간을 묻는 유일한 인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후반부에 밝혀지듯) 실제로는 기억을 잃지 않은 사람이기에 시간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기억을 잃는 것이 중요하기에 무언가를 해소하기 위해 얼마큼의 시간이 드는지 늘 확인하려 한다. 지금이 몇 시인지, 언제쯤이면 나을 수 있는지, 언제까지 이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하는지. 그러나 늘 그렇듯 마땅한 답을 얻지 못한다. 결국 계속해서 이 생을 살아야 할 뿐이라는 사실만 그의 앞에 놓일 따름이다.
ⓒ모쿠슈라픽쳐스
다소 눈에 띄는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남자는 길을 걷는 도중, 어느 상점 앞에 전시된 작은 텔레비전에서 행복한 얼굴의 남녀 한 쌍이 등장하는 화면을 한동안 쳐다본다. 지극히 범상한 영상으로, 남녀의 사랑만큼 단순하고 지루한 화면이 또 없다. 그런데 자신조차 기억을 못 한다는 남자는 어째서인지 이를 유심히 응시한다. (아직 그가 거짓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 장면은 일견 배움의 과정처럼 보일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원광경을 보듯, 몰랐던 것을 갑작스레 목도하여 놀란 경험으로 보이기도, 혹은 새로운 감각을 어렴풋이 인식해나가는 순간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막을 내린 후 영화 속 장면들을 복기하며 이 장면을 떠올릴 때, 필자를 비롯한 많은 관객은 다음과 같이 깨닫지 않을까. 그는 행복해 보이는 남녀의 화면을 통해 어떤 감정을 망각했다가 새롭게 배우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현현했던 무엇인가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 것이다. 화면 속의 남녀가 진짜 주인공 남자와 그의 연인은 아니지만, 그가 보던 영상은 삶의 중요한 순간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했기에 그를 오랫동안 붙잡아둘 수 있었을 것이다. 쇄신을 목적으로 수행되던 사진 촬영이 (실제 환자들에게는) 불능으로 귀결되는 반면, 주인공 남자는 늦은 저녁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타인의 얼굴들 때문에 지난날 행복했으나 현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복잡한 기억의 능력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새로운 것은 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억의 소환과 회집을 위해서는 ‘새로운 자아’가 가능하다고 믿는 순진한 웅변이 아니라, '다시'의 역설이 필요하다. 물론 그 ‘다시’는 언제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테지만, 기억이란 (기억을 ‘매개하는’ 사진과 달리) 기억 자체이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는 그것과 우리는 영영 싸우면서, 그것을 더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