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에서 기른 회복탄력성,
성장과 행복으로 이끄는 엔진

이병곤

제천간디학교 교장
건신대학원대학교 대안교육학과 겸임교수

대안학교에서 기른 회복탄력성,
성장과 행복으로 이끄는 엔진

이병곤

제천간디학교 교장

건신대학원대학교
대안교육학과 겸임교수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다양한 역경, 시련, 실패에 대한 인식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고 사전에 정의되어있다. 이러한 정의에 의지하지 않아도, ‘회복탄력성’이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 대개 동의할 것이다. 첫 번째는 힘겨움이고, 두 번째는 그것의 극복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전이 정의하지 않은 회복탄력성의 또 다른 특성을 도출할 수 있다. 바로 인간 마음의 ‘성장’이다.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사람은 반드시 모종의 성장 요인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 험한 곳에서 어찌 사나!

제천간디학교는 10대 청소년 105명과 교사 21명이 함께 지내는 중고교 통합 6년제 기숙형 비인가 대안학교로, 제천시 남부 끝자락에 있는 덕산면 산골에 자리한다. 본관 건물과 기숙사 사이는 1km가량 떨어져 있는 데다가 기숙사는 산 중턱에 있어서 풀, 꽃, 벌레, 나무, 하늘, 어두운 밤, 새벽안개를 바라보며 통학하는 게 일상이다.


처음 입학한 아이들은 스스로 빨래하기, 식기 설거지하기, 담당 구역 청소하기를 익힌다. 1년 전까지는 생태화장실을 운영1)했는데, 대변과 왕겨가 섞인 똥통 6개를 매일 오후 커다란 두엄보관함에 비운 후 물로 깔끔히 닦아 두어야 당번 임무가 끝났다. 생태화장실 청소 당번은 우리 학교 교사와 학생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한 학기에 한 번은 해야 했다. 우리가 사는 곳을 스스로 관리하는 노동은 당연하지만 고되다. 거주 여건도 편친 않은데. 교실과 강당 같은 공용 공간의 냉난방 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여름이면 후텁지근하고 겨울에는 무척 춥다. 청정 자연 지역이라 그런지 기숙사에 벌레도 많다. 잊을 만하면 지네에 물려 일주일 정도 고생하는 아이들이 꼭 있다.

배경에 보이는 목조 건물이 바로 생태화장실이다. 2022년 2월 철거 직전, 교사들이 함께 모여 이 건물과 작별 인사를 했다. ⓒ제천간디학교

도시에서 나고 자란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고야, 그렇게 험한 곳에서 아이들이 어찌 사나” 싶을 것이다. 한데, 사람의 환경 적응력은 생각보다 빠르다. 신입생들은 입학 후 한 학기 동안 새로운 생활 조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동급생·선배들과 학우 관계를 맺는 등 학교생활에 빠르게 적응한다. 물론 적응하기 쉽지 않은 일도 있다. 다른 이들과 심리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익히는 일은 오랜 시간과 많은 경험을 요구한다.

회복탄력성은 무중력 상태에서 길러지지 않는다. 워너와 스미스(Werner & Smith)를 비롯한 이 분야의 숱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회복탄력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 맺음 경험이 필요하다.” ‘사회적 관계 맺음’이라는, 이 추상적 표현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2020년대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지평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 안팎에서 나는 만났다. 강박, 불안, 극심한 우울감, 대인기피 등으로 아파하고, 반복해서 자해하는 청소년들을. 이제 성인이 된 제자들은 힘겨움을 극복하고 제 갈 길을 찾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살아가고 있으니 다행이지만, 지금 힘겨워하는 아이들이 좀 더 일찍 자신들의 힘듦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제는 여전하다.

 


사회적 관계 맺음의 다양한 형태

청소년기의 극심한 불안정 심리는 어디에서 올까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사회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늘어가는 맞벌이·한부모·조손가정, 정답 맞히기 시스템에 최적화한 교실에서 점점 줄어드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내적인 교류, 친구들끼리의 작당이나 사귐보다 휴대전화 콘텐츠에 더 집중하는 생활 양식 등은 풍부하고 폭넓게 관계 맺는 삶을 저해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발전한 삶의 패턴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타인과 깊이 관계 맺는 일에서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사람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김춘수, 「꽃」)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어떤 일을 함께 도모하는 관계 맺음에서 성공도 좌절도 겪고, 기뻐하기도 슬퍼하기도 하는 경험을 쌓으며 나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발견해나간다.


작은 생활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다 보면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목적 사이에서 크고 작은 부딪침이 일어난다.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므로 개인의 회복탄력성은 공동체 안에서 길러지고 발휘된다. 4년 전, 기숙사에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의 물품에 손을 대고 간식을 허락 없이 가져다 먹은 일이 발생했다. 비상총회가 열렸고, 여러 목격자의 증언을 종합해 보니, 누구든 기숙사로 올라가서는 안 되는 평일 낮 시간대에 사건이 발생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누가 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백 쪽지’를 내보자는 제안에 여러 차례 작은 종잇조각을 돌려 투표함에 넣고, 도난 사건 담당 학생이 투서 내용을 확인해봤지만 끝내 ‘범인’의 자백은 없었다.2)


그러자 우리 학교에도 폐쇄회로카메라(CCTV)를 설치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아이들은 다시 토론을 시작했다. 찬성과 반대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찬성 측 학생들은 “계속되는 비상총회로 너무나 긴 시간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 힘들고 싫다. 기숙사 내부 말고, 현관 출입문 쪽에 하나만 설치하면 되니까 사생활 침해도 아니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반대 측 학생들은 “감시 카메라 설치는 우리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우리 스스로 잘 사용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과 자발성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제천간디학교에서 감시 카메라가 등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우리가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맞섰다. 투표가 시작됐다.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지 말자는 쪽이 다수였다.


이와 비슷한 큰 토론이 한 해에 두세 번 이뤄진다. 일반 식품 취식 규칙, 외출 외박 규칙, 휴대전화 사용 규칙 등이 그 주제이다. 최근에는 일주일에 한 번 학교 급식을 채식 식단으로 운영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격렬한 토론을 거쳐 표결한 끝에 올 연말까지 수요일마다 전교생이 채식을 경험해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학생총회의 결정에 따라 학교 주방에서는 채식 식단에 맞는 식자재를 주문하고, 교사들도 일주일에 하루는 채식 밥상으로 세 끼를 먹는 게 당연한 일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지난 9월 24일 서울시청 부근에서 열린 ‘기후정의행진’에 제천간디학교도 참여했다. 제천간디학교 몸짓동아리 ‘기지개’가 집회 참여자들 앞에서 공연하는 모습. ⓒ제천간디학교

‘작용’과 ‘소통’ 익혀야 싹트는 배움

학교는 여러 갈래의 관계가 얽힌 그물망과 같다. 동아리, 학생회를 비롯한 각종 위원회 조직, 7개의 작업장 운영 및 협의 체제, 여러 학년의 학생들을 섞어서 10명 이내로 편성한 8개의 통합반, 성소수자 인권을 옹호하는 ‘무아지경’이나 통일 이슈를 공부하는 ‘통통통’처럼 같은 관심사로 모인 그룹 등이 그것이다. 아이들은 작은 모둠 안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고, 작게라도 제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 같은 활동에 교사가 함께할 수도 있고, 온전히 아이들 스스로 운영해나가기도 한다. 우리 학교는 ‘얽힘’, ‘참견’, ‘동의 구하기’, ‘구성원 보호’, ‘갈등의 중재와 조정’ 같은 미묘하고 복잡한 가치들이 서로 얽힌 관계망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스스로 다양한 모둠을 만들고, 모둠 안팎에서 토론하고 협력하며 소통을 경험한다. 무엇이든 함께 결정하고 합의에 이르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용’하고 ‘소통’하는 절차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회복탄력성의 흐름. ⓒ이병곤

내가 교내에서 관찰한 회복탄력성 순환 과정을 위의 그림으로 정리했다. 누구나 낯선 상황에 놓이게 마련이고, 새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애착이 형성된다. 이때 믿고 의지할 사람은 한 명뿐이어도 충분하다.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교사나 동료가 있는 학생은 회복탄력성이 생성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회복탄력성에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성장 본능이 내재한다. 자신감을 얻은 학생은 학교생활 전반에 안착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내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역할과 임무를 찾아 나서게 된다. 이러한 선순환이 반복되면 학생은 차츰 학교 공동체의 주인으로 나설 수 있다. 학생 스스로 원하는 일을 수행하도록 가만히 놓아두거나 교사나 또래 집단과 서로 존중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다양한 관계망을 지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는 활동, 맡은 일을 해내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며 배우는 경험 역시 이러한 협력 문화 안에서 이뤄진다.


이렇게 학교에서 점점 커가는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마당이 있다. 바로 공연이다. 지난 10월 8일 토요일, 개교 25주년 기념 무대를 크게 마련했다. 학부모를 포함한 350여 명이 공연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밴드, 댄스 동아리, 뮤지컬 팀 등에 속해 공연 준비에 열심히 참여했다. 공연 날짜가 다가올수록 초조했는지, 연습 장소와 준비 시간이 모자랐는지 아이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연습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아침 10시에도 졸린다며 해롱거리던 아이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밴드 연주, 작곡, 랩, 믹싱(mixing) 같은 음악 분야에 관심 있는 아이들에게 공연 경험은 더한 의미가 있다. 중등 과정 3학년에 다니는 아이들은 고교 과정 진학을 앞두고 논문을 써야 하는데 논문 주제로 자신들의 경험 분야를 다룬다. 논문 제목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 이야기를 담은 포크 음악 만들기’, ‘판소리로 풀어낸 간디 3년 생활 – 간디 3년가 & 치킨가’, ‘내 삶을 담은 자작곡 만들기’. 인기 밴드 ‘새소년’의 리더 황소윤은 10년 전 우리 학교에서 ‘블루스 장르 연구를 통한 블루스 작곡’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실제 활동과 논문으로 발전시키는 단계를 거쳐 고등학년으로 진급한 학생들의 자신감은 한결 탄탄해진다.

20주년 기념공연 무대에 선 아이들의 모습. ⓒ제천간디학교

미래교육 열쇠는 ‘협력적 행위 주체성’에 달렸다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앤 마스텐(Ann Masten) 교수는 회복탄력성을 ‘일상의 마술’이라고 불렀다. 이 능력은 누구나 갖고 있기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믿고 지지해주는 자세에서 시작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미래교육과 관련하여 ‘교육 2030’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러 제안 가운데 한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이 학습자의 ‘행위주체성(Agency)’이다. 앞으로 우리가 맞는 미래는 지금보다 더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일 텐데, 이런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역량이 곧 학습자의 행위주체성이라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또한 ‘협력적 행위주체성(Co-agency)’을 강조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학습 경험과 기회를 연결하고 협력하는 교육과정 설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나는 회복탄력성 없이 학습자의 행위주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고 본다. 학습을 비롯한 학교생활은 궁극적으로 아이들의 행복감 증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아이들이 지식과 기술을 익히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 직면한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삶의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앞으로 있을 다른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맞설 수 있다. 학교에서 다양한 관계 맺음을 경험하는 아이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되레 행복감을 느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비인가 대안학교를 운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이 높은 수준의 회복탄력성을 가진 사람으로 커가도록 지지하고 독려하는 대안학교는 여전히 유효하고 소중한 교육 공간이다. 그러고 보면 대안학교의 회복탄력성 역시 만만치 않게 질긴 것 같다. 

ⓒ제천간디학교


1) 생태와 순환 농법을 중시하는 우리 학교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2022년 2월 폐쇄됐다. 목조 건물의 들보가 삭아서 안전 문제가 제기됐고, 학교에서 농사짓는 밭에 필요한 거름보다 양이 너무 많아져서 올바른 ‘순환’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학교 공동체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첫째, 기존 6칸 규모에서 1칸으로 축소한 새로운 생태화장실을 마련하여 퇴비를 만든다. 둘째, 교사 뒤편 창고 공간을 활용해 수세식 화장실을 새로 증축한다.


2) 가끔 발생하는 도난 사건 가운데, 이 같은 ‘고백 쪽지’ 돌리기 방식으로 40~50%의 사건이 해결되기도 한다. 물건, 과자, 돈을 가져갔다고 자백한 아이는 피해 당사자에게 사과하는 말과 함께 언제까지 변제할 것인지, 어떻게 자기 행동을 반성할 것인지 쪽지에 적어놓는다. 

20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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