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진 작가
이룹빠! 구성원 (활동명_두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도 변화의 기류가 감돌고 있다.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움을 던지고 있지만, 끝이 가깝다는 희망적인 신호를 감지하고 새로운 일상을 향해 변화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어느새 ‘팬데믹’은 기억의 공간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구상이 들어서고 있다.
팬데믹 기간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줌(Zoom), 구글 미트(Google Meet) 등의 도구를 이용한 비대면 교육 비중이 커지면서 온라인 환경이 중요해졌다. 이와 함께 오프라인 접촉, 즉 대면의 기회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식도 변했다. 단적인 예로 영화관처럼 여럿이 모여 함께 즐기는 곳들이 운영을 멈추면서 홀로 보내는 시간을 채울 궁리도 많아졌다. 우리 ‘이룹빠!’가 맞이한 변화도 이에 대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룹빠!는 ‘어린이 되기’를 중심 가치로 두고 있다. 어린이와 창작자의 공통점인 엉뚱함, 기발함, 창의성에 기반하여 ‘어린이처럼 느끼고 놀듯이 사고하기’, ‘두려움을 다스리기’를 모토로, 창작자의 예술적 경험이 어린이와 만나 일으키는 상호작용을 통해 일종의 ‘미디어’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미디어는 매체를 뜻하며 신문, 영화,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를 일컫지만, 우리(이룹빠!)가 말하는 미디어는 정보를 주고받는 모든 매개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룹빠!가 다루는 미디어는 소리, 몸짓 등 소통의 섬세한 수단은 물론이고 작업에 사용되는 각종 도구와 물건들로 확장된다. 또한 미디어는 세포 배양에 쓰이는,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함유한 ‘배지(培地)’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서 예술적 경험 자체가 어린이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라는 개념으로도 다뤄진다. 예술교육을 매개로 어린이의 이야기를 수집·교환하고, 그 이야기들이 변형과 통합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결과물이 되어 쌓이는 곳. 이룹빠!는 이렇게 모으고 나누고 매만지고 다시 모으기를 반복하는 ‘수집가들’의 모임이자 스튜디오이다.
‘이룹빠!’ 스튜디오 내부 전경. ⓒ이룹빠!
이룹빠! 스튜디오가 진행하는 예술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의 모습. ⓒ이룹빠!
대면과 비대면이 공생하는 예술교육
팬데믹 기간 이룹빠! 역시 어린이와 창작자 다수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교환하는 기존의 방식을 바꿔야 했다. 전면 멈출지, 소수 인원으로 꾸린 대면 워크숍과 같이 제한적으로 개방할지, 어떻게 해야 적절히 대응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영화관을 대신하는 온라인 플랫폼이 내 방처럼 개인적인 공간에서 향유되며 활성화했듯이, 이룹빠! 역시 줌과 구글 미트 등을 활용한 비대면 수업과 메타버스 환경을 어떻게 작업에 활용하고 공유할 것인지 고민하고 실험했다. 그리고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마주했을 메타버스 환경에 대응하는 대안적인 교육 실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진행하던 활동이 팬데믹으로 일시 정지가 되어버린 당혹감은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곧 이 당혹감은 내친김에 쉬어가자는 생각으로, 쉬면서 그동안의 작업을 아카이빙하고 지금 어린이들이 마주하는 미디어 환경 및 메타버스에서의 미디어 예술교육에 대해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이룹빠!와 협업해온 ’퓨쳐랩‘에서 IT 기술을 활용한 워크숍을 진행하며 새로운 전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퓨쳐랩은 온라인게임 개발업체 ‘스마일게이트’의 사회공헌재단인 ‘희망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아동·청소년 창의환경’ 연구소이다. 여기서 ‘창의환경’이란 아동·청소년이 창의성을 키우고 자기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을 뜻한다). 이룹빠!는 퓨쳐랩이 제안한 ‘아트앤테크’ 키트 기획과 ‘마이크로비트 글로벌 챌린지’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후자는 영국 BBC에서 개발한 ‘마이크로비트(micro:bit : 쉽고 재미있는 컴퓨터 교육을 위한 싱글 보드 컴퓨터)’와 재료 키트를 활용해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에 관련된 사회문제를 전 세계 곳곳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이벤트이다.
‘마이크로비트 글로벌 챌린지’의 재료 키트. ⓒ퓨처랩
비대면 방식의 수업을 기본으로 하는 프로젝트지만 이룹빠!는 대면, 비대면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하기보다는 유연한 방식으로 이 워크숍을 풀어나가기로 했다. 총 3-4회차로 이루어지는 워크숍을 기획했는데, 브레인스토밍 ─ 마이크로비트와 재료 키트를 이용한 제작 ─ 제작 과정을 공유하고 창작자의 도움 받기 ─ 결과물 공유, 이렇게 네 단계로 구성했다.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한 1회차에서는 줌으로 만나 브레인스토밍하는 시간을 보냈다. 학교 수업에서 이미 줌을 경험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일방향 소통 방식이기 쉬운 학교 수업과는 달리 쌍방이 활발하게 소통하도록, 친구들끼리 자유롭게 대화하는 흐름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하였다. 2회차 때는 재료 키트를 전달했는데, 우편으로 받거나 이룹빠!의 무인택배함을 이용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온라인 쇼핑 방식에 착안해, 사전에 이메일로 아이들이 직접 그린 아이디어스케치와 (마이크로비트 외에)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아이들이 직접 기재한 주문서를 이룹빠!에 제출하게 했다. 3회차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상담하였는데. 이메일, 화상통화, 채팅, 대면 만남 가운데 각자 원하는 방식을 정해 카카오톡 그룹채팅방에서 예약한 후 상담을 진행했다. 작업한 것을 직접 가지고 온 친구도 있었고 이메일로 재료를 추가 주문하는 친구도 있었다. 4회차에서는 친구들끼리 작업을 공유하고 직접 챌린지 홈페이지에 올렸다. 큰 주제 안에서 함께 탐구하고 이야기도 주고받지만 각자 원하는 방식과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도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 이를테면, 재미가 없어서 작업을 포기해도 되고, 이에 반해 더 작업하고 싶어서 재료를 더 요구하기가 편해 ─ 내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챌린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대면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들을 할 수 없어서 답답하기도 했고, 다양한 소통 방식에 일일이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고, 어린이들의 반응을 확인하는 데 제한이 많아서 교사의 몰입도가 더 요구되는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대면 방식에서 흔히 겪는, 어린이마다 흥미를 갖는 것이나 흥미를 느끼는 정도가 다른데도 다수의 결정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따라가는 모습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비대면 방식의 큰 매력이자 장점이었다.
마이크로비트 글로벌 챌린지 1회차 수업은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룹빠!
이렇게 대면과 비대면 방식이 어우러지는 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동력은 퓨쳐랩의 지원이 없었다면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퓨처랩은 창작자와 참여자들이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과 물리적 거리 등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도록 커뮤니티 플랫폼과 화상 미팅 프로그램을 비롯한 기술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이룹빠!와 같은 창작자들이 이러한 전문적인 도움 없이 홀로 비대면 방식의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원하는 예술교육을 기획하고 이끌어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헛된 몰입감이 아닌 참된 놀이 정신
얼마 전 재미있는 영상 하나를 보았다. 한 배우가 나무판에 올라가 연신 위아래로 몸을 흔들며 칼을 휘두르고 고삐를 붙잡는다. 실제로는 말도 없고 칼로 베어야 할 적도 없지만 배우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영화 ‹한산›에서 변요한 배우가 말을 타고 싸우는 장면을 연기하는 영상이다). 이 상황을 보면 웃음이 새어 나오는 한편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컴퓨터그래픽(CG)이 발전하면서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홀로 연기하는 일이 보편화했는데, 상대도 없고 상황을 나타내는 단서들도 전혀 없는 조건이라서 배우의 엄청난 몰입을 요구한다.
어린이와 비대면으로 온라인 수업을 한다는 것은 퍼포먼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블루스크린 앞에 선 배우의 연기와 비슷하다. 미디어 관련 기술이 발전하면서 배우들이 그런 역할을 ─ 상상력을 총동원해 연기하도록 ─ 요구받는 것처럼,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많아지면서 문화예술교육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조건은 교육환경 이전에 미디어 환경에 일반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각종 블로그와 소셜미디어, 유튜브 방송 등이 우리를 에워쌈에 따라 사용자는 날 것으로서의 환경으로부터 몇 겹으로 차단되어 있고, 미디어 간의 연쇄적인 상호 참조를 통해 콘텐츠가 생성되기 때문에 일종의 블루스크린적인 환경이라 부를 만하다. 이처럼 무엇이든 미디어 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으나 링크의 연쇄를 타야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속성을 우리는 ‘하이퍼미디어’라 부른다.
소셜미디어를 예로 들어 보자. 펜데믹 시간을 겪으면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소셜미디어 환경에 스스로 몰입하게 되었다. 소셜미디어의 소규모 그룹의 결속력에 크게 기대어 자기를 꾸미고 드러내는 데서 심리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소비생활을 과시하며 자신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 등은 블루스크린적 몰입의 징후 중 하나이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감을 느끼기 위한 자기 몰입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미디어 환경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가 블루스크린 앞에 서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블루스크린은 오프라인의 문맥을 차단해버리고 ‘진공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배우는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을 연출해야 하고 어떤 대사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상상력을 동원하여, 즉 이미 미디어화된 창조물을 통해 작업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영화의 시나리오와 같은 약속된 스크립트가 없는 조건에서 블루스크린에 놓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소셜미디어이다. 무엇이든 인용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짜깁기할 수 있는 환경. 문화예술교육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둘러싼 인문사회적 환경에서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현실을 살펴볼 줄 아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이러한 하이퍼미디어 환경에 거리를 두고 현실을 성찰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궁리하고 시도하는 것이 이룹빠!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열매키트’는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이룹빠!가 자체적으로 만든 놀이도구다. 키트는 다양한 모양이 인쇄된 실크스크린 도판, 잉크, 스퀴지(squeegee : 잉크가 잘 스며들도록, 판 위에 부은 잉크를 누르면서 밀어내는 데 쓰는 도구), 스틱, 스티커, 종이, 설명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용자는 필름에 인쇄된 모양으로 캐릭터와 배경을 만든다. 그리고 이룹빠!가 안내하는 연상 기법을 활용해 저마다의 상상력이 낳은 형태들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부여하고 그 이름들을 넣어 문장을 만든다. 그리고 이것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한다. 이 문장들은 모여서 이야기가 된다. 문장들의 순서를 뒤섞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각자 가지고 있는 재료를 덧붙여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룹빠!가 자체 개발한 ‘열매키트’. 이 안에 실크스크린 도구와 설명서 등이 들어있다. ⓒ이룹빠!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그림에 또 다른 그림을 그려넣는 모습. ⓒ이룹빠!
여기서 실크스크린 미디어는 이야기에 참여하는 매개가 되며 예기치 않은 이야기들의 가지치기는 미디어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를 변형하고 다루는 힘을 키워준다. 이룹빠!는 사용 방법과 연상하는 기법을 제공하고 사용자가 들려줄 이야기를 예상하며 블루스크린 앞에서 연기한다. 하지만 여러 사용자가 참여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것은 방해받는다. 서로 방해하고 방해받는 과정에서 문맥이 변형되고 변화를 거듭하는 것은 결말이 열려 있다는 걸 의미한다. 여기서 ‘놀이’와 ‘몰입’의 섬세한 구분이 이루어진다. 예측하되 예단하지 않고 대응하며, 불규칙한 변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나가는 어린이의 ‘놀이 정신’이 허구의 몰입감으로 타락하지 않고 지켜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감을 느끼기 위해 자기 몰입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침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어린이의 놀이 정신을 지키기 위한 이룹빠!의 고민과 실험 역시 ‘놀이’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