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
온라인 독서모임 ‘잇다-읽다’ 참여자, 새내기 영월군민
올해 초 영월로 이주하고 산책 겸 탐방 차 집 앞 사거리를 나선 때였다. 커다란 절개지와 그 앞 인공폭포에 눈길이 갔다. 주변은 꽤 신경 써서 만든 듯한 공원이고, 나무 데크로 만든 길도 나 있었다. 길이 어디로 난 건지 궁금해서 숨을 헐떡이며 올라간 기억이 있다. 길은 생각보다 긴 데다 오르막이어서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할까 망설였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꼭대기에 도달하자, 영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영월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 도시가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숨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커다란 건물이 서 있고, 트인 공간에는 야외 전시물이 설치돼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걸까 궁금했다. 나중에서야 그곳이 ‘동강국제사진제’가 열리는 동강사진박물관 부지라는 것을 알았다. ‘영월’과 ‘국제’라, 어딘지 어색했다.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해마다 국제사진제를 연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잠시, 사진제의 나이가 20살이나 된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새내기 영월군민인데다 사진에 문외한인 내겐 생소한 행사지만, 다른 영월군민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영월에서 처음 맞는 회사 연차 때, 다른 직원에게 하루 동안 휴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묻자 가장 먼저 대답한 장소가 바로 동강국제사진제였으니 말이다.
동강국제사진제가 열리는 동강사진박물관 가는 길. ⓒ이선희
2020년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시국 속 국내 다른 축제 및 대규모 행사와 마찬가지로 동강국제사진제 또한 그해 행사를 전면 취소하고, 이듬해인 2021년에는 축소하여 진행했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이 바뀐 올해 성년을 맞은 동강국제사진제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길래 기대하며 사진박물관으로 향했다. 본관 입구에서 영월군민 할인 티켓을 구매하니 전시 안내도는 물론, 2층 행사장에서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 한 장을 바로 인화할 수 있는 쿠폰 선물도 받았다. 전시 안내도와 쿠폰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자 1층 한편에 ‘동강 사진마을 선언문’이 있었다. 나는 영월이 사진마을이라는 사실을 선언문을 읽고 비로소 알았다(선언문의 영향력이 컸는지 선언문을 본 뒤 왠지 모를 사명감이 생겨 작은 토이 필름카메라를 하나 샀다. 이따금 이 카메라를 들고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는 취미가 생겼다). 선언문을 읽고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 맞은편 갤러리가 보였다. 갤러리 한쪽에서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사진엽서를 볼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엽서를 한 장 집어 들고 제1전시실로 향했다.
본관 제1전시실 맞은편 갤러리에 진열된 참여 작가들의 사진엽서. ⓒ이선희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룹 f.64 강렬히 시각화하기’라는 암호 같은 전시명과 맞닥뜨렸다. 소개글을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서 찾아보니 그룹명으로 쓰인 ‘f.64’는 ‘대형카메라 렌즈의 최소 조리개 수치’를 뜻했다. 이는 피사계 심도(depth of field : 사진의 초점이 맞은 것으로 인식되는 범위)를 최대 수치로 유지하는 것으로, 전경(前景)부터 배경까지 균일하게 초점을 맞추어 정밀하고 현실적인 조형미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제1, 2전시실에서는 미국 스트레이트 사진 역사를 새로 쓴 f.64의 초기 멤버 11명의 작품 130여 점을 선보였다. 앞서 읽은 설명을 되새기며 사진을 보다 보니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얼마나 예술성이 뛰어난지 파악하고 공감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f.64의 멤버들이 사진을 독립적인 예술 형식으로 정착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이 실험하고 실패를 거듭했을지 생각하며 마음이 경건해졌다. 한편으로는 미국 스트레이트 사진 역사나 f.64의 업적과 같은 정보를 모른 채 사진을 봐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흑백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사진은 보는 이를 각자의 ‘그 시절’, ‘그 장소’로 데려가는 힘이 있다.
본관 입구에서 영월군민 할인 티켓과 함께 받은 사진 인화 쿠폰. ⓒ이선희
2층에 있는 제2전시실 밖에는 입장할 때 받은 쿠폰으로 사진을 인화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스마트폰 앨범에서 가족사진을 골라 인화하고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뜻밖의 선물을 선사한 이벤트 덕분에 한층 더한 만족감을 느끼며 본관 밖으로 나가 제3전시실이 있는 별관으로 갔다. 이곳에서는 올해 동강사진상을 받은 김녕만 작가의 ‘시간을 품다’ 전이 진행 중이었다. 1970년대 초부터 50년간 그의 시선이 붙잡은 120여 점의 사진이 펼쳐졌다. 곳곳이 논밭이던 시절에서 산업화를 거쳐 높은 건물과 넘치는 인파로 북적이는 도시가 된 서울, 뜨거운 민주화 운동의 열기, 판문점이 상징하는 남북분단의 현주소, 권력 무상을 드러내는 전직 대통령들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다양한 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예전에 사진을 굉장히 잘 찍는 선배에게 사진을 잘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 선배는 ‘일단 피사체에 한 발자국만 가까이 가보라’고 했다. 김녕만 작가의 사진을 보고 있는데 선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사진에 무지한 나도 이름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보도·다큐 사진작가인 김녕만의 사진을 더욱 가치 있게 하는 것은 현장감과 생생함이다. 사진의 현장감과 생생함은 작가가 현장에 스며들 듯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갔음을 입증한다. 이뿐만 아니라, 사진을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만드는 작가의 해석은 사진의 차원을 한층 높였다. 김녕만 작가는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는 모습을 찍었는데, 사진 속 대통령은 차창 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고 비눗방울이 떠다녔다. 떠나는 대통령과 비눗방울을 한 장면에 담은 김녕만 작가는 모든 권력이 언젠가는 비누 거품처럼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밝혔다.
김녕만 작가의 50년 사진 인생을 총망라한 사진전 ‘시간을 품다’ 전시 전경. ⓒ이선희
이어지는 제4, 5, 6,전시실은 영월군예술창작소 스튜디오 건물에 있었다. 제4전시실에서는 보도사진가전이 열렸다. ‘人 the VIEW_레전드,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주제로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한국일보의 고명진, 조선일보의 구자호, 중앙일보의 최재영 사진기자의 사진을 보면서 지난 시대를 되새겨 봤다. 노동자가 분신(焚身)하는 모습과 치열한 시위 현장처럼 말로 듣고 글로 읽기만 한 장면들을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진으로 접할 수 있었다.
제5전시실에서는 ‘루시드 트라이앵글’이라는 주제로 강원도사진가전이 진행됐다. 강원도와 강원도민의 일상적인 삶의 기록은 강원도의 아름다움과 이곳 삶의 의미를 담았다. 가장 인상 깊은 사진은 전제훈 작가의 ‘마지막 광부들’이라는 연작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대부분의 탄광은 폐광이 되었고, 2025년까지 나머지 탄광도 점차 폐광할 예정인 가운데, 한때는 근대화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그들의 땀과 삶을 기록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월 역시 지금은 폐광지역이지만 옛날엔 탄광이 성업한 지역으로 알고 있다. 삶의 가능성을 찾아 전국에서 모여든 그들의 검은 땀은 시간이 흘러 세상이 달라져도 변함없는 가치를 지닌다.
광부이기도 한 전제훈 작가가 지난 20년 간 탄광 현장에서 만난 광부들을 찍은 연작 ‘마지막 광부들’의 한 장면. ⓒ이선희
제6전시실에서는 ‘영월사진싸롱展’이라는 이름으로 영월 스토리텔링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영월문화도시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공모사업 중 하나인 ‘사소한 시선’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자리로, 이른바 ‘포토아마추어리즘’ 전시이다. 아마추어의 시선으로 마을을 탐색하며 저마다 자유로운 구도로 영월에서 만나는 것들을 재발견하고 다시 포착해보자는 취지의 프로젝트로 보였다. 영월은 좁다면 좁아서 나는 이 사진전에 참여한 주민 18명 중 10명을 알고 있다. 즉 이 전시에 나온 사진들은 나에게 멀지 않은 사람들이, 내가 평소 생활하는 동네의 모습을 찍은 것들이다. 이 작가들은 영월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영월군민이다. 자신의 시선 끝에 있는 모습에 집중해서 사진을 찍고, 이것을 전시하는 일은 굉장히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내 일상을 기록하는 일은 나도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사진마을’이라는 영월의 별칭이 조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영월 스토리텔링전 ‘영월사진싸롱展’ 전시 전경. ⓒ이선희
‘영월사진싸롱展’에 출품한 <공간>(윤지혜, 2022), <바람이 부네요>(김민영, 2022)(오른쪽), ⓒ이선희
김녕만 작가의 사진을 전시하는 제3전시실 아래층의 제7전시실에서는 국제공모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팀 스미스(Tim Smith)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유레카! 일종의 계시’라는 주제로 마련된 전시는 13년 전 작가와 후터파 교도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오랜 인연을 담은 사진들을 선보였다. 전시장에 걸린 팀 스미스 작가의 사진들은 캐나다 서부와 미국 북서부에 걸쳐 집단 거주하는 후터파 교도(Hutterites)의 모습을 담았는데, 이들은 현대 산업 사회와 거리를 두고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며 고유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유대감을 중시하며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모습을 유쾌하고 편안한 방식으로 담고 있는 독특한 사진들은 남다른 느낌의 장면들을 만나는 재미를 선사한 한편 오늘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우리에게 시사점을 남겼다.
후터파 교도의 소박한 삶을 포착한 사진 가운데 기도하는 모습이 많았다. 팀 스미스(Tim Smith) 작가가 13년 간 후터파 교도와 함께하며 이들의 일상을 포착한 ‘후터파 교도’ 연작 중 두 장면. ⓒ이선희
건물에서 나와 야외에서 전시하는 다른 국제공모전 사진과 전국 초등학생 사진일기 공모전 작품들을 보러 바깥으로 나섰다. 동강사진박물관은 영월군청 앞 3,000여 평에 이르는 부지에 세워져 활용할 수 있는 야외 공간이 넓은 데다가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기 좋게 잘 조성되어 있다. 굳이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고 산책하면서 야외 전시를 빙 둘러보아도 좋겠다 싶었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알지 못하는 나는 모든 전시 가운데 아이들의 솔직하고 순수한 시각으로 직접 일상을 찍은 사진 이야기가 담긴 이 공간이 제일 좋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머물렀던 순간을 보면서 나는 사진 속 그곳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생각해보게 됐고, 순수했던 내 어린 시절과 동심을 끄집어낼 수도 있었다. 매일 ‘특별할 것 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이렇게 사진 한 장에 하루를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은 타성에 젖은 몸과 마음을 환기했다.
야외 전시 전경. ⓒ이선희
전국 초등학생 사진일기 공모전 전시 전경. ⓒ이선희
영월은 ‘사진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 곳곳의 경관이 아름답고, 사진과 관련된 경험을 직접 해볼 수 있는 지역이다. 이번에 방문한 사진제 역시 영월에서 사진을 만족스럽게 즐기는 좋은 기회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알차게 꾸린 전시가 타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를 보러 서울에서 놀러 온 많은 친구 중 아무도 동강국제사진제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고, 영월에 이런 행사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나 역시 영월에 오기 전까지 다르지 않았다. 동강국제사진제가 타지역에 보다 널리 알려져 국제적이기에 앞서 전국적인 사진제가 되었으면,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사진은 물론 영월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성년을 맞이한 영월 사진마을의 앞날이 더 많은 명장면으로 가득하길 기대한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동강사진박물관의 모습. ⓒ이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