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연 작가
『북한 여행 회화』
『여행하는 마음』저자
사흘간의 연휴인데도 화천 산양리터미널을 중심으로 한 거리는 한적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온 듯한 군인들이 간혹 보였고, 그밖에는 기지개를 켜거나 담배를 태우러 잠시 나온 상인들 정도가 전부였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모텔에 남은 객실이 없다’는 대답이 썩 믿을만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였다. 낡은 여관방을 찾아 짐을 풀었다. 질이 썩 좋지 않은 화장품이 담긴 수납함에 붙은 스티커가 어딘지 달갑지 않은 듯한 대답의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생명사랑 숙박업소 :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혼자 고민하지 말고 연락주세요.’ 관광객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보기 힘든 곳에 홀로 찾아든 이를 의심하는 마음의 연유가 어느 정도 가늠되었다.
사방거리는 산양리터미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있다. ⓒ김준연
연휴인데도 거리는 한산했다. ⓒ김준연
사방거리의 ‘좋았던 시절’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걷는 데 15분쯤이면 충분한 이곳은 ‘사방거리’라 불린다. 산양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사방으로 길이 나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한 60대 남성은 80년대 즈음만 해도 이곳에서 영업한 유흥업소만 줄잡아 50개가 넘었고 종업원도 200명이 넘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슈퍼마켓을 운영하다 지금은 편의점을 지키고 있는 초로의 토박이 여성도 80년대를 ‘좋았던 시절’로 기억한다.
“여기서 태어나서 살고 있어요. 토박이가 많은 동네죠. 저는 아무래도 고향이라서 여기가 좋아요. 타지를 다녀오더라도 산양리터미널에 가까워지면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이곳 상인들은 주로 군인들을 상대해요. 위수지역(군사 부대가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려고 장기간 머무르면서 경비하는 지역. 외출이나 외박 시에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이 사방거리로 한정됐을 때에는 정신없이 바쁠 정도였죠. 그런데 위수지역이 넓어지고 난 뒤로는, 연휴가 길면 군인들이 다들 멀리 갑니다. 사병은 보통 화천 읍내로 가고 간부들은 더 멀리 가고. 요즘에는 평일에도 군인들이 외출을 할 수 있으니까, 주말보다 평일 저녁에 오히려 손님이 더 많은 게 현실이죠.”
위수(衛戍)지역이 지금처럼 넓지 않았던 2000년대 초, 나는 이곳 화천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또 다른 ‘거리’에서였다. 지는 달이 마치 고개에 걸린 듯 보인다 하여 ‘달거리고개’라 불리던 곳인데,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 봉투에 주소를 적노라면 조금쯤 부끄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는 지명이었다. 당시 나는 외박 때마다 부대에서 가능한 먼 곳으로 가려고 애썼다. 아마도 고참이 되어서도 피할 수 없던, 군대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어떤 긴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을로 돌아올 때면 마음이 놓인다는 편의점 주인에게 사방거리의 구심력이 작용하고 있다면, 그 당시의 나에게는 달거리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원심력이 작용했던 것이다. 지금 군대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도 긴장감은 여전할 터이다. 위수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점점 더 멀리 나아가려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온 군인들이 사방거리의 경제를 지탱한다. ⓒ김준연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긴장의 반대편에서 우리가 찾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문화의 향기, 또는 놀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사방거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50대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사방거리에서 식당을 한 건 25년쯤 됐어요. 위수지역이 풀리기 한참 전부터였죠. 그때는 장사가 잘됐어요. 위수지역이 묶여 있어서 군인들이 다른 곳에 갈 수 없었으니까. 지금은 타격이 커요. 장사가 예전만 못하죠. 여기는 화천 읍내나 춘천 시내와 비교해서 모든 시설이 부족해요. 주민 수도 많지 않고. 장사가 유지되려면 군인들이 밖으로 나가는 만큼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거리가 전혀 없죠.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 모두 다요.”
2018년 초 군 적폐청산위원회가 장병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수지역을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을 때 사방거리와 같은 접경지역 인근 상인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인들의 반발에 따라, 방침은 위수지역을 완전히 폐지하는 대신 일부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그 결과 화천 군인들의 위수지역은 춘천으로까지 넓어졌다. 화천에는 약 2만 6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그와 비슷한 규모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지역 상권 대부분은 군 장병을 상대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위수지역을 확대하면서 발생한 피해가 상인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것을 막으려면 화천군으로서는 장병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오래 화천에 머물도록 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문화’와 ‘놀이’였다.
먼저 DMZ시네마가 생겼다. 1층에는 다목적 체육관과 체력 단련실, 동아리방을 갖추고 2층에 99석 규모의 상영관을 마련하였다. DMZ시네마는 군인뿐 아니라 지역 주민의 문화에 대한 갈증도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듯했다. 영화 시작 전에 지역 상점 및 축제를 소개하는 홍보 영상을 내보내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한 것도 참신한 시도였다.
젊은 군인들은 DMZ시네마와 산양리 장병 쉼터가 생긴 덕분에 사방거리에서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김준연
올 초에는 산양리 장병 쉼터도 문을 열었다. 1층에 북카페, 2층에 스크린 야구장, 3층에 스크린 골프장을, 그리고 4층에는 휴게시설 등을 갖추어서, 즐길거리를 찾아 외지로 나가던 장병들이 복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부대 인근에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DMZ시네마와 산양리 장병 쉼터 바로 앞의 식당 주인은 이러한 문화시설의 효용을 증언한다.
“영화관이나 스크린 야구장‧골프장은 주민들도 많이 이용해요. 없을 때보다는 훨씬 좋죠, 뭐. 사방거리에 머무는 군인들도 조금쯤은 는 것 같고요. 위수지역이 풀렸더라도 여기에 도시처럼 놀거리가 다양하다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을 거예요. 젊은 군인들을 위한 시설이 필요했는데, 그런 갈증이 조금이나마 풀렸달까요. 이번에 마무리된 경관조성사업 이후에도 마을이 깨끗해졌다는 얘기를 많이들 해요.”
DMZ시네마 뒤편에서 시작하여 사방교로 향하는 길에는 지난여름 ‘산양평화지역 경관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경관조명이 설치되었다. ‘어둠이 있어야 별이 빛나는 법’, ‘너만의 향기가 나는 꽃이 되길’, ‘그대와 함께하는 삶이 꽃길이어라’ 같은 친근한 대화체 문구로 만든 차분한 조명이 밤길을 걷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마을 안길 담장도 밝고 발랄한 느낌으로 새 단장을 했다. 사방거리는 한창 새로운 모습을 갖춰가는 중이었다.
경관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의 담장들도 새로운 옷을 입었다. ⓒ김준연
DMZ시네마는 군인뿐 아니라 지역 주민의 문화 생활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김준연
경관조명이 밤길을 걷는 이들을 반겨준다. ⓒ김준연
사방거리에만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방거리 인근에 주둔하는 부대 장병들이 이곳에 머물게 하기 위한 시설과 환경이 조금씩 갖추어지고 있어 다행인 한편 지금 필요한 것은 사방거리 바깥의 사람들, 즉 외지인이 사방거리를 찾아오도록 만드는 일이겠다. 각종 시설을 짓고 경관을 가꾸는 식의 개발만으로 지역 문화를 부흥시키기란 어렵다. 「2021 전국 문화기반시설 총람」에 따르면 강원도 인구 백만 명당 문화기반시설 수는 제주도(200.11개)에 이어 전국 2위(152.32개)이다. 하지만 강원도 내 시설 이용률은 전국 최하위이다. 시설은 많은데 이용자가 적다는 사실은 흡족하게 누릴 만한 문화 프로그램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이제는 새로운 시설을 들이는 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사방거리에 들어서는 시설에 걸맞은 콘텐츠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DMZ시네마에서 영화 시작 전에 트는 지역 상점과 축제를 소개한 영상 같은, 지역이 지역을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콘텐츠가 바로 그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것으로는 외지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없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을 찾아 사방거리를 방문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차이야말로 낯선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이들을 끌어들일 무기다. 사방거리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다. 그 고민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로 사방거리를 마저 채운다면, 그곳 상인들에게도 낯섦을 찾아온 여행자가 익숙해질 것이다. 설령 그 여행자가 홀로 사방거리를 찾았다 하더라도.
ⓒ김준연